활극(活劇).
피와 땀, 주먹과 발길질, 총질과 칼질이 맞붙은, 한자 말 뜻 그대로 생생히 살아있는(活) 이야기다. 해적선, 마적단, 보물선 등 인간의 원초적 욕구와 욕망에 목숨을 건 일대 모험극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활극이 대유행이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년)를 비롯해 '광야의 호랑이' '불붙은 대륙' '무숙자' '석양의 불청객' 등 만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60, 70년대 좁은 땅에 살고 있는 궁핍한 사람들을 영화적 판타지로 어루만졌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은 이때 만주활극과 스파게티 웨스턴을 뿌리로 하고 있다.
스파게티 웨스턴은 정통 서부영화의 변종으로 한때 인기를 누렸다. 이탈리아 특유의 왁자지껄한 과장이 버무려진 변종 웨스턴이다. 정통과 구별하기 위해, 또 생산지 표시를 위해 '스파게티'를 붙였다.
그 대표작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1964년). 당시 TV에서 조연으로 활동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세계적인 배우로 만든 작품이다. 2편 격인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1966년)는 영어제목을 '좋은 놈, 나쁜 놈, 못난 놈(The Good, The Bad, The Ugly)'이라고 달았다.
'놈놈놈'은 무지막지한 멕시코 군대를 일본군으로 변형해 조선에서 건너온 센 '세 놈'이 활극을 벌인다.
서부영화의 매력은 남성적 본능과 덧없는 욕망이다. 선과 악의 경계도 총알보다 가늘고, 삶과 죽음의 무게도 황야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보다 가볍다. 거센 총격전의 끝, 먼저 총을 뽑아야 하는 대결 장면에서 언뜻 느껴지는 고요함은 마초적 낭만의 극치다.
김지운 감독이 오마주(원작에 대한 경외심)하려고 한 것도 바로 아련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같은 남성적 비장미다.
시인 류인서는 시 '활극처럼'에서 쇠붙이를 남성적 상징으로 보고 있다.
특히 거대한 기차,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호쾌하게 질주하는 이 쇳덩이는 모든 남성들이 추앙하는 '딕 스틸(Dick Steel·쇳덩이 같은 남근)'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 위에서 스카프에 향수를 뿌리고, 또 다른 '딕 스틸'인 총을 난사하는 마적의 꿈이란 것도 허공에 날리는 기차 연기처럼 공허한 것일 터. 그래서 시인은 '이쯤에서 총 한방쯤 먹여주고 가지 않고'라며 아쉬워한다.
산은 죽고, 해는 떨어지고, 강물은 마르고, 그리고 기린은 피를 흘리는, 보물 없는 보물지도 위에 목숨을 얹어 키를 까부는 세 놈의 무념무상 활극, 우리가 준비한 꽃다발은 뭘까?
화가 장숙경은 세 놈의 실루엣을 한 폭에 고루 담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순서로 넣다 보니, 나쁜 놈이 전면 중앙에 배치됐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와 달리 '놈놈놈'은 세 놈에게 비중이 고루 분산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치고 달리는 추격전이 굴곡 없이 평행선을 긋고, 빈약한 스토리를 액션으로만 끌고 가다 보니 관객이 쉽게 지친다.
세 명 중에서 이병헌의 캐릭터가 가장 꿈틀대며 생동감이 넘친다. 검은 의상에 살을 빼고, 눈 밑까지 그늘이 진 그의 눈빛은 광기가 서려 있다.
화가 또한 '나쁜 놈'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뒤에 평행선을 그으며 달려가는 모터사이클을 배치했다. 실루엣조차 희끗희끗한 톤으로 그려 우리 사회의 실종된 마초의 현실을 은근하게 은유하는 듯하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감독:김지운
출연:정우성, 이병헌, 송강호
러닝타임:139분
줄거리:1930년대 만주. 다양한 인종이 뒤엉키고 총칼이 난무하는 무법천지의 땅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격동기를 살아가는 조선의 풍운아, 세 명의 남자가 운명처럼 맞닥뜨린다. 좋은 돈 되는 건 뭐든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최고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마적단 두목 박창이(이병헌), 잡초 같은 생명력의 열차털이범 윤태구(송강호).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채 태구가 열차를 털다 발견한 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추격전을 펼친다. 정체불명의 지도 한 장을 둘러싼 엇갈리는 쟁탈전 속에 일본군, 마적단까지 이들의 레이스에 가담하게 되면서 결과를 알 수 없는 대혼전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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