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함께 자취하며 엄마같던 언니의 한마디

지금부터 27년 전 내가 수능 칠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땐 학력고사라 했던가

나는 시골에서 대구로 유학 와서 언니 그리고 동생 둘과 함께 자취를 했다. 언니가 맏이라 힘든 일을 도맡아 했고, 나는 고 3이라 새벽에 학교 가서 야간 자습까지 하고 늦은 밤에나 오니 집안 일은 무엇이나 언니 차지였고, 언니는 매일 자그마치 도시락을 4개나 싸야했다.

내 도시락 2, 고1 남동생 도시락. 중학생 남동생 도시락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가 회사 일을 하면서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했나 싶고 내가 지금 내 아이 하나 키우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 당시 언니가 하는 일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도와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다.

학력고사 치는 날 언니가 싸 준 도시락이 아직까지 내 마음에 고마움으로, 또 아픔으로 남아 있다. 언니는 그 날 조금이라도 시험을 잘 보라고, 도시락을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게 신경 써서 밥도 찹쌀을 섞어서 근기 있게 해주고, 입맛 까다로운 동생을 위해, 반찬도 평소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로, 그리고 따뜻한 물도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 다들 그 정도야 챙겨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언니는 언제나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침 밥해 동생들 다 챙기고 마지막으로 자기 준비를 해서 회사에 가고, 또 모든 가사 일을 혼자서 다 했으니 지금의 가정 주부 보다 더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 도시락이 객관적으로 봐서 더 좋을 진 몰라도 당시에 내 도시락은 나에겐 최고였고, 부모님 대신한 언니의 도시락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학력고사 칠 때도 고사장까지 데려다 주는 부모님도 있었고. 또 같이 따라와서 고사장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님들도 계셨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서 모두 시골에 계시는 터라 아무도 따라오지 않으셨고, 요즈음은 그 흔한 전화 한통조차 없으셨다. 당시는 휴대 전화도 없었고 자취하면서 전화까지 있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던 시대였다. 전화 한통조차도 주인집으로 걸어서 바꿔 달라도 해야하니, 딸에게 시험 잘 보라고 말 한마디 해주고 싶어도 못 했을 것이다. 대신 언니가 평소엔 잘 하지 않던 말 한 마디 툭 던진다. "시험 잘 봐"

그 말 한 마디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그때 못 한말 한마디 "언니, 정말 고마워."

이지희(대구 북구 국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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