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옥관의 시와 함께] 공기는 내 사랑/정진규

감자 껍질을 벗겨봐 특히 자주감자 껍질을 벗겨봐 감자의 살이 금방 보랏빛으로 멍드는 걸 보신 적 있지 속살에 공기가 닿으면 무슨 화학변화가 아니라 공기의 속살이 보랏빛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되실 거야 감자가 온몸으로 가르쳐주지 공기는 늘 온몸이 멍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지 제일 되게 타박상을 받는 타박상의 一等, 공기의 젖가슴이 가장 심해 그 타박의 소리를 어느 한밤 화성 근처 보통리 저수지에서 들은 적 있어 밤 이슥토록 떼로 내려 앉았다가 무엇의 습격을 받았는지 일시에 하늘로 치솟아 오르던, 세상을 들어올리던 청둥오리떼의 공기, 일만평으로 멍드는 소리를 들은 적 있어 폭탄 터졌어 그밤 그 순간 내 사랑도 일만평으로 멍들었어 그 소리의 힘으로 나 여기까지 왔지 알고 보면 파탄이 힘이야 멍을 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나를 감자 껍질로 한번 벗겨봐 힘에 부치시걸랑 나의 멍을 덜어가셔 보탬이 될 거야 이젠 겁나지 않아 끝내 너를 살해할 수 없도록 나를 접은 공기, 공기는 내 사랑!

공기도 멍이 드는구나. 이건 정말 몰랐다. 그래서 사과의 속살도 벗기면 금세 멍이 들었구나. 부드러운 것일수록 쉽게 멍드는 걸 알았음에도 어찌 공기가 멍드는 걸 몰랐을까. 어둠이 아플까봐 금세 전등을 켜지 못한다는 사람들. 여릴수록 "제일 되게 타박상을 받는 타박상의 一等"인 것들. 타박을 받아내는 사랑의 멍이 있어서 세상은 이만큼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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