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단원 김홍도의 신들린 듯한 붓놀림과 신윤복의 섬세한 붓질이 인상적이다. 특히 초상화를 그려낼 때 섬세한 터치로 작은 주름 하나까지 그려내는 솜씨가 놀랍다. 저토록 섬세한 선이 붓끝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붓은 대구무형문화재 15호 모필장 이인훈(63'대구 달서구 본동'삼우당필방 대표)씨의 작품. 최근 개봉한 영화 '미인도'에 등장하는 붓 역시 마찬가지다. 옛 그림이나 글씨가 나오는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에 이씨의 붓이 등장한다. 그가 전통붓의 유일한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전통붓인 족제비털로 만든 황모붓, 청솔모 꼬리로 만든 청모붓, 노루털로 만든 장액붓은 나밖에 못 만들어요. 중국붓이 대거 들어오면서 타산이 맞지 않는 전통붓은 자취를 감추었죠. 전라도에 양털로 만드는 붓 제작기술이 전해지는 정도입니다."
특히 붓털을 3겹으로 만드는 전통기술을 가진 이는 세계에서 이씨가 유일하다. 이는 두 겹으로 만들어진 붓과 달리 탄력이 강하다. 50여년간 전통붓에만 매달린 결과다.
그는 삼동필 붓을 전통붓의 핵심으로 꼽는다. 선비들이 세필'중필'대필 세 가지 붓을 하나의 대롱에 넣어 다녔던 휴대용 붓으로,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품이라 이씨가 아니면 만들지 못한다.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가 늘 가지고 다니는 붓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들도 많다. "한국화에서 호랑이털을 묘사하려면 일일이 붓으로 다 그려야 하지만 저는 한번에 150~200가닥을 그릴 수 있는 붓을 개발했어요. 최근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공작붓인데, 이걸 만들기 위해 1년 이상 고민해왔죠."
'하루라도 연구하지 않는 날이 없다'는 이씨의 말대로 그의 손끝에선 털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붓으로 거듭난다.
그의 좁은 거실엔 50여종이 넘는 붓들이 걸려있다. 재료도 가지각색. 한우의 귓속털을 비롯해 돼지, 금계, 꿩, 양모, 족제비, 멧돼지, 토종닭의 털 등 털은 모두 붓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수숫대로 만든 붓도 있다. 이 가운데 그에게 가장 기념비적 붓은 2미터는 족히 넘는 말꼬리로 만든 대형 붓. 무게만도 55kg로, 세계에서 가장 큰 붓이란다. 이 붓에는 100마리가 넘는 말의 꼬리를 사용, 전시 때마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금이야 모필장으로 무형문화재 칭호도 받았지만 전통 붓에만 매달려온 50여년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전통 붓의 맥을 잇는답시고 셋방을 전전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내 윤경숙(61)씨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묵묵히 그를 뒷바라지해 왔다. 때문에 이씨는 자신의 공 70% 이상이 아내의 몫이라고 단언한다. 이제 아내 윤씨도 전통붓의 전문가다. 윤씨의 테스트를 거쳐야 온전한 작품으로 탄생한다.
이씨의 작업실에는 서예나 한국화 대가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독특한 작품세계를 위해선 이씨의 붓이 필수라는 것. 미국'일본 등지에서도 주문이 이어진다.
하지만 좋은 재료를 구하는 일은 갈수록 힘이 든다. 강원도에서 1~3월에 잡은 짐승의 털을 최고로 치기 때문이다.
다행히 전통붓 제작의 맥이 4대째 이어지고 있다. 할아버지 고 이달호(1960년대 초 작고)씨가 고향 청송에서 3'1운동 주동자로 몰려 서울에 피신하면서 붓 만드는 법을 배워 선친 고 이상재(1972년 작고)씨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이씨가 기술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한 것이 16세 즈음. 이제 한국 유일의 전통붓 계승자인 그의 뒤를 막내아들인 석현(25)씨가 잇고 있다. 늦둥이로 낳은 아들이 아니었으면 전통붓의 맥이 끊겼을지도 모른다며 이씨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붓 만드는 과정은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하나를 만드는 데에 150번 이상의 손길이 가죠. 알면 알수록 어렵고 두려운 길입니다. 전통의 맥을 이어가도록 제자를 양성하고 지금처럼 오직 한 길만 걷는 것입니다."
때마침 25일부터 대구문화예술회관 3,4전시실에서 대구시무형문화재전 전시가 열려 이씨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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