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쌓이는 재고…멈춰선 화물차…포항공단 가보니

▲ 늘어선 화물차: 포항 제2산업도로 입구 공단도로에는 물량이 없어 노숙하는 차들이 줄지어 서 마치 화물연대 파업 당시를 연상케 한다. 포항 박정출기자
▲ 늘어선 화물차: 포항 제2산업도로 입구 공단도로에는 물량이 없어 노숙하는 차들이 줄지어 서 마치 화물연대 파업 당시를 연상케 한다. 포항 박정출기자

"10년전 외환위기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그땐 순전히 국내문제였지만 이번엔 세계 경제 사정에 따른 외부 요인에서 비롯된 불황이거든요."

18, 19일 이틀간 본격적인 불황이 닥친 지 3개월째에 접어든 포항공단 곳곳을 둘러봤다. 이곳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로 "우리가 손 쓸 여지가 없다.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근로자들도 "언제쯤 감원얘기를 본격 제기할 것인지 회사 측 눈치만 보며 지낸다"고 했다.

◆감원 갈림길= 최근 중국과 미국에 출장을 다녀온 공단업체 A사장은 "우리는 벌써 휘청거리고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불황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고 돌아왔다"고 했다. "9월 이후 수출물량 주문이 한 건도 없었는데, 앞으로도 언제쯤 제대로 된 주문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는 일단 수익성이 떨어지는 분야를 골라 아웃소싱으로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기업의 B상무는 "체면을 벗어던지겠다"고 했다. 감산에 들어간 지 2개월째, 이 회사는 그동안 쉬는 부서 직원들을 정상 출근시켜 사내 청소도 하고 잡초 뽑기 등 사소한 일로 시간때우기를 했다. B상무는 "그런데 가동률이 떨어지니 청소할 일도 줄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풀도 더이상 자라지 않아 출근해도 할 일이 없다. 조만간 장기휴가 실시가 불가피하게 됐다"며 "부끄럽지만 노동부 신세를 져야할 것 같다"고 했다. 감원을 하지 않는 대신 노동부의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아 직원들의 임금 일부를 충당하겠다는 말인데, B상무와 같은 복안을 가진 사용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다만 대기업 가운데 어느 회사가 먼저 나서느냐만 남았다고 입을 모았다.

대기업 인사담당 C부장은 "유급휴직이냐 무급휴직이냐를 두고 고심하고 있는데 간부 무급·사원유급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며 "우리가 이런 정도면 중소기업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희망가가 없다= "그때는 자동차(산업)는 죽어도 조선(산업)이 살았고, 철근은 안 팔려도 용접봉은 품귀였고, 내수는 죽어도 수출이 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살아남을 분야를 찾을 수 없어 모두가 죽을 것처럼 보인다."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 박재호 상무는 10년 전 IMF사태 당시와 최근의 사정을 이렇게 비교 설명했다.

포항공단에서는 거짓말처럼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연기량이 줄고 있다. 회사 안팎을 막론하고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재고가 쌓여 있다. '이 물량을 다 팔려면 전국을 쇠로 뒤덮어야 되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D사의 제품 야적장 경비원은 "반입량이 늘면서 요즘은 재고를 쌓을 수 있는 만큼 높이 쌓아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포항공단과 맞닿아 있는 연일읍과 오천읍 등지에 산재해 있는 고철업체들 중 일부는 아예 문을 닫기도 했다.

조업을 하는 업체들의 사정도 딱하다. 3교대 근무를 2교대로 전환, 작업시간을 단축한 E·F사의 경우 1근(오전 7시~오후 3시)과 3근(오후 11시~오전7시)만 조업하고 대낮에는 쉬고 있다. 상대적으로 값싼 심야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대를 택한 것. E사의 김모 차장은 "요즘 회의 주제는 '오늘은 뭘 줄일까'하는 단일 사안으로 고정된 듯하다"고 전했다.

◆기약없는 내일= 포항공단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형산강 하구. 요즘 강가에는 평일에도 낚시꾼들이 제법 많다. 강 가운데로 낚시를 던진 뒤 빠르게 감아 숭어 등 잡어를 잡아내는 '훌치기'를 하는 이들이다. 이 낚시는 미끼없이 바늘에 숭어의 등이나 배·지느러미 등을 걸어내는 방식이다. 19일 연일대교 밑에서 만난 F사의 현장 사원 김모(39)씨는 "집에 있어도 할 일이 없어 돈이 들지 않는 훌치기 낚시하러 나왔다"고 했다.

이날 오후 2시쯤. 포항공단과 제2산업도로를 잇는 미주제강 네거리 근처에는 줄잡아 수십대의 트레일러와 고철 운반차량 등 빈 화물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 곳은 화물연대 사태 때 파업참가 차량 집결지로 유명세를 탔는데 요즘 일거리가 없어 세워둔 차들이 마치 파업당시를 연상케 했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많아 보였다. 근처 주유소에서 나오던 트레일러 기사 윤모(49·부산 수정동)씨는 "제품도 없고 고철도 없어 물량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중"이라며 "점심내기나 심심풀이로 치는 점 10원짜리 고스톱이 일과처럼 돼가고 있다"고 일상사를 소개했다. 운송업체 사장 강모(60)씨는 "지난 6월에 비해 일거리가 60%가량 줄어 지입차주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될 상황"이라고 했다.

한 고철업체 사장은 "미수대금이 100억원 가까운데 철강사 불황으로 수금이 안돼 생사기로에 놓였다"며 "결제해 줄 것은 다 해 줬는데 정작 받을 건 못 받고 있으니 버틸 힘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불황이 깊어지면서 대기업·원청사·발주사들의 중소 하청업체나 납품사에 보이지 않는 횡포도 서서히 늘고 있다고 주장했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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