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프랑스 베르사유 배석판사인 26세의 청년이 교도소 조사차 미국으로 건너간다.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조국에서 느끼지 못한 민주주의를 몸소 경험하고는 미국인들의 몸에 밴 '공익을 위한 헌신'과 '자원봉사 정신'에 감탄한다. 특히 기계적 연대가 아닌 유기적 연대에 의해 자율적 참여로 운영되는 시민조직단체를 격찬했다.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는 시민참여의 예술(art of association)에서 나온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지금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분류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다.
토크빌의 분석대로 미국의 시민참여 정신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빛을 발했다. 압권은 9'11테러. 어처구니없는 테러에 당시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세계의 자유와 기회를 위한 가장 빛나는 등불이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등불이 밝게 빛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연설로 국민을 감동시켰다. 이라크 파병 행렬이 줄을 이었고, 주식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국민들은 주식 투매를 스스로 자제했다.
이런 미국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 아니 변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외부에서 침투한 바이러스가 아니라, 내부에서 곪아 터진 종양이 원인이므로 이를 제거하는 데 상당한 고통이 요구된다. 그야말로 '변화의 쓰나미'가 덮쳐올 것이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남다른 고통을 받은 사람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앨런 그린스펀일 것이다. 그는 2006년 1월 은퇴할 때까지 미국 최고위 임명직으로는 아주 드물게 19년 동안 레이건에서 부시까지 4명의 대통령을 모시며 '경제 대통령'을 자처해 왔다. 재임 기간 중 정부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고 시장 기능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번영을 이끌어 왔다. 이런 정책이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그는 청문회에 서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이를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저서 '격동의 시대'에서 미국경제를 예측한 부분이다. 그린스펀은 예기치 못할 사항, 즉 핵무기 폭발'유행성 독감'포괄적 보호주의의 극적인 재등장 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2030년 미국의 실질 GDP는 2006년 대비 75%나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가정한 '보호주의'가 극적으로 재등장하고 있으니 그의 예측은 빗나가겠지만 가정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제대로 한 셈이다.
이제 미국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에 접어들 것이다. 세계 경제학의 교과서였던 미국이 내부 신용불량으로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와 다름없는 탐욕의 치부를 드러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대수술은 정해진 수순이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 정권인수위원회가 내놓은 오바마-바이든 플랜도 "공정무역을 위해 싸울 것이며 미국의 경제 안보를 훼손하는 협정에 대해서는 맞설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린스펀의 가정대로 보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발언이다.
이제 한국은 훌륭한 '실패학 교과서'를 만났다. 이번에 운 좋게도 미국의 위기 극복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것도 세계경제대국들이 모인 G20회의를 주도하는 입장에 있으니 훨씬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경제의 가장 큰 강점은 '복원력'이다. 미국은 1929년 대공황은 물론, 1980년대의 부동산 시장 불황, 1990년대의 경기후퇴, 2000년대 초반에 일어난 닷컴 버블의 붕괴를 이겨냈다. 이처럼 이번에도 미국은 틀림없이 재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폭풍이 얼마나 드셀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 미국의 위기 극복 과정을 철저하게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공공부문 개혁도 제대로 못해 공기업 간부 집 침대 밑에서 상품권 2천만 원어치가 발견되는 대한민국, 이제 제대로 된 미국식 개혁을 직접 공부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의 '실패학 강좌'에 눈을 부릅떠야 한다.
윤주태 논설위원
댓글 많은 뉴스
12년 간 가능했던 언어치료사 시험 불가 대법 판결…사이버대 학생들 어떡하나
[속보] 윤 대통령 "모든 게 제 불찰, 진심 어린 사과"
한동훈 "이재명 혐의 잡스럽지만, 영향 크다…생중계해야"
홍준표 "TK 행정통합 주민투표 요구…방해에 불과"
안동시민들 절박한 외침 "지역이 사라진다! 역사속으로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