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떠밀려 앞만 보고 달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게 된다. 거기엔 지나온 삶의 궤적들이 기억의 저편 창고 속에서 희미한 영상으로 켜켜이 겹쳐져 있다. 그 중 하나를 꺼내 쌓인 먼지를 털면 '386세대'들이 빙그레 웃고 있다.
아! 그때 그 공간. 아스라한 추억들이 피어오른다. 담배연기 자욱했던 대폿집. 야한 그림에 이끌렸던 만화방과 검정교복에 유난히 하얀 칼라가 멋있었던 그 여학생과의 빵집. 배관이 허옇게 드러나 있던 목욕탕과 갈 때마다 새끼돼지들을 젖먹이는 어미돼지 그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던 이발소. 퀴퀴한 종이냄새로 꽉 찬 헌책방 등등. 온갖 상념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에 이제는 세월의 힘에 부대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그 공간 속으로 추억의 편린들을 찾아 떠나본다.
◆막걸리 냄새 진동했던 대폿집
198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막걸리를 마시던 찌그러진 알루미늄 주전자와 술잔을 잊을 수 없다. 보시기에 담긴 강냉이와 생고구마 조각, 허접한 나물무침을 안주 삼아 시국과 독재정치, 젊음의 로망을 떠들어 대던 대폿집. 초저녁부터 실내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간혹 예쁜 여학생과 잔을 기울이는 옆 테이블을 향해 힐긋 곁눈질을 던지기도 하며 여의치 않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아직 채우지 못한 목마름을 뒤로 하고 나와야 했던 적도 있다.
대폿집 하면 지금도 빼놓을 수 없는 안주감은 역시 고갈비. 고등어 한손을 통째로 굽고 그 옆에 소금 한 숟가락을 얹은 고갈비는 쓰린 속을 달래주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지금의 대구백화점 뒷길. 그 유명한 공주식당과 너구리식당 등은 사라졌지만 반월당 골목길의 학사'박사주점이 있었던 대폿집은 여전히 희미한 명맥을 아직 이어가고 있어 더욱 살가운 정감이 오간다.
◆숨 막히는 입시교실 해방구, 만화방
초'중'고 때 만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학생이 있을까. 30여년 전 대개 만화방은 구멍가게와 겸업이 많았다. 떡볶기랑 납작만두를 먹어가며 보던 만화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요즘처럼 시간 당 보는 게 아니라 권당 얼마씩 내고 보거나 낡은 장판을 조각낸 티켓(?)을 끊어 한 권 볼 때마다 하나씩 주인에게 내는 식이었다. 당시엔 어느 만화가게든 토박이 불량(?)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어 가끔은 동전이나 티켓을 상납해야 만화가게를 들락거릴 수 있었다. 그들은 또 가게 구석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며 야한 외국잡지를 보다가 안면을 익힌 어린 학생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기억조차 희미한 이발소와 목욕탕
흰 가운에 언제나 단정한 머리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던 이발소 주인과 면도 아주머니와 견습생이 반갑게 손님을 맞던 이발소. 주인은 어릴 적 머리카락을 깎으러 갈 때면 널따란 판자를 의자에 걸치고 그 위에 앉게 했다. 그 때는 왜 그리 빨리 커서 판자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지. 머리카락을 깎은 후 비누거품을 귀밑에서 목 뒤로 바르는 손길은 시원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이발이 끝나고 세면대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으면 이발소 주인의 무지막지한 머리감기가 시작된다. 비누거품이 눈에 들어가 따가워도 다 씻을 때까지 꾹 참아야 했다. 늙수그레한 중년 아저씨 다리를 안마하고 있는 면도사 아가씨나 아주머니의 손길에선 뭔가 야릇한 분위기가 묻어나 얼굴을 돌릴 때도 있었다. 머릿솔로 두피를 빡빡 밀던 이발사의 손길, 헤어드라이어 대신 노란 수건을 쫙 펴서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던 그 소리….
뽀얀 수증기가 꽉 차 있던 목욕탕은 또 어떤가. 비좁은 탕 안에서 장난이라도 할라치면 옆 집 아저씨의 부라린 눈치를 봐야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 남탕을 혼자 들어갔을 땐 때만 잔뜩 불리고 나와 어머니께 혼쭐이 난 적도 있다. 그날 저녁 찬 바람이 부는 셋방 부엌 처마 밑에서 떨면서 어머니의 거친(?) 때밀이를 고스란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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