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사람을 느끼다1-집착의 상처

베트남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자주 찾는 맥주집이 있었다. 50대 후반의 독일인 남자가 다양한 독일 맥주를 공급하는, 허름하지만 꽤 양질의 맥주들을 맛볼 수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집을 자주 방문한 이유는 맛있는 맥주보다는 가게 안의 분위기와 주인 남자의 표정 때문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다닥다닥 붙은 여자 사진과 마주친다. 가정 집 침대에 누워 있기도 하고, 소파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기도 한 미모의 젊은 베트남 여자. 그 옆에 간혹 눈에 띄는 어린 여자 아이 사진. 누굴까? 술집 분위기와 너무도 동떨어진 사진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손님들은 궁금해 한다. 나도 궁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된 것은, 주인 남자가 베트남에 와서 결혼한 아내와 딸이었다. 이쯤 되면 궁금증은 더해진다. 왜 가족사진을 하필 가게에 걸어놨을까? 사연은 이렇다.

남자는 12년 전에 독일의 다국적 기업 직원으로 베트남에 왔다. 우연히 호텔 바에서 만난 사진 속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남자는 독일에 있는 아내와 이혼 후 이 여자와 결혼을 했다. 직장도 그만두고, 이 남자는 새로운 연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맥주 집을 차렸다. 아이도 태어나고, 둘은 꽤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1년쯤 흘렀을까? 여자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맥주 집 단골손님과 눈이 맞아 여자는 홀연히 떠났다. 이 후 남자는 오늘까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이 여자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자칫 신파조 같은, 이 사랑 이야기보다는 다시 이야기하지만 가게 분위기와 남자의 표정이다. 남자를 수 개월간 지켜 본 결과, 남자는 표정이 없다. 그 어떤 표정도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은 보는 이를 전율시킨다. 인간은 희로애락애오욕의 표정이 있어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지 않아도, 표정없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전율을 넘어서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보다 못해 말을 건네도 아무 표정없이 힐끗 바라만 보는 그의 얼굴.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해서 집착하면서 오는 상처만한 것이 또 있을까? 이처럼 누군가를 사랑해서 집착하는 것조차도 사람을 이토록 황폐화시키는데 말이다. 특히 때때로 초등학생인 이 남자의 딸마저 가게에 나와서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가게 안을 왔다 갔다 할 때는, 솔직히 착잡하다.

그리고 사족 하나. 이 가게는 항상 아줌마 부대의 단골손님들 때문에 늘 성업 중이라는 것, 여기에 우리 인간의 모순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동훈(대구미래대 영상광고기획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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