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질의 남자, 금욕적인 성자, 기사, 신사, 재규어 사냥꾼, 부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명예와 높은 지위를 얻은 이들이다. 명예와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은 역사적으로 계속 바뀌어왔다. 스파르타에서의 남자는 근육질에 싸움을 잘하고, 성욕이 왕성하고, 가족생활에 별 관심이 없고, 장사와 사치를 싫어하는 남자가 존경을 받았다.
476~1096년 서유럽에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1096~1500년 1차 십자군전쟁 이후 시기의 서유럽에서는 기사가, 1750~1890년 잉글랜드에서는 가족을 사랑하는 신사가 지위를 얻었다. 1600~1960년 브라질에서는 과묵하고, 춤을 추지 않고, 자식을 키우는 데 관여하지 않고, 무엇보다 재규어를 죽이는 데 능숙한 사냥꾼이 명예를 얻었다.
2000년대 이후 요즘에는 부를 축적한 사람이 단연 존경의 대상이다. 부자들은 창의성, 용기, 지능 등의 미덕이 있다고 칭송받는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실패자'로 묘사되고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레 펴냄)이라는 책에서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기 때문에 불안이 야기된다고 분석한다.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 등으로 인해 불안한 것이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욱 커진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불안은 어쩌면 부와 권력에 안달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욕망의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의 병에 시달린다면 존 러스킨의 말에 귀를 기울여봄직하다. 러스킨은 18세기 이후 경제적 능력주의자에 대한 과대평가를 경계했다. 러스킨은 '최후의 이 사람에게'(Unto This Last'1860)에서 부자는 금전적 기준이 아니라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 등의 덕목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돈 자랑을 하고 싶은 부자들에게는 쓴웃음을 자아내는 말일 테지만.
와인의 비밀은 포도밭의 '테루아르'(terroir)에 달려 있다고 한다(만화 '신의 물방울'). 포도밭의 토양과 배수 등의 환경이 와인 맛을 결정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러스킨이 제시한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 등의 덕목이야말로 특급와인인 그랑크뤼(grand cru)에 해당하는, 진정한 부자의 테루아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TV 드라마인 '가문의 영광'이 화제다. 드라마에서처럼 종가와 졸부 집안의 차이는 물질적 부가 아니라 가문의 환경, 즉 테루아르가 아닐까.
"불안은 무엇보다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와 나누는 대화, 성공을 거둔 절친한 친구에 관한 신문기사 등으로 유발된다. 질투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드러내는 것 역시 사회적으로 경솔한 행동이다. 보통 어디에 몰두한 듯한 눈길, 부서질 것 같은 미소,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을 들은 뒤 이어지는 유난히 긴 침묵 등으로 간간이 나타날 뿐이다."
연말을 맞아 동창회 등 모임이 잦아지고 있다. 혹여 모임에서 친구들의 성공 소식을 듣더라도 불안이 유발되는 듯한 눈길이나 미소, 침묵은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조심'(!)할 일이다.
불황의 긴 겨울이 예고되고 있다. 저마다 돈과 지위가 상실되지나 않을까 불안해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가장 간단하게 불안을 줄이는 방법은 루소가 말한 '벌거벗은 야만인'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돈과 지위에 대한 갈망이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조심할 일이다. 그런데, 부자의 시대가 지나가면 다음에는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까.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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