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눈물 마를 날 없는 베트남 여성 원티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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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아이도 데리고 와서 같이 살 겁니다. 그래서 빨리 한국말 배울 겁니다"라는 '베트남댁' 원티띠(25)씨의 모성은 뜨거웠지만 갓난 둘째아이의 병이 깊어질까 두려워하는 초보 엄마의 속내는 차마 감추지 못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TV에서 처음 본 한국 사람들은 참 정겨워 보였습니다. '깜은(고맙다)'이라며 베트남말로 인사하는 모습은 다른 나라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끌렸나 봅니다. 삼 남매 중 맏이였던 저는 한국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호찌민에서 멀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님의 어깨도 덜어주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본 신랑은 잘생긴 외모에 건강해보였습니다. 언어가 달라 마음을 털어놓기 쉽지 않았지만 노력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34세의 신랑은 24세인 저와 나이 차가 많지 않은 편이어서 더 그랬습니다. 20세씩 차이 나는 경우도 있다고 주위에서 들어온 터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시골도 아닌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시집 간다는 생각에 들떴습니다. 드디어 지난해 2월 '베트남댁'으로서 시댁인 한국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아가씨들이 그렇듯 제게도 한국은 '제2의 삶'이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25일 대구파티마병원에서 만난 원티띠(25·여)씨는 아직 한국말이 서툴렀다. '한국 좋아요, 시댁 싫어요'라는 두 마디 외에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함께 온 대구이주여성인권상담소장과 베트남 동포 여성인 뜨란티냔(25)씨가 통역을 도왔다.

이날 이들이 파티마병원에 온 이유는 원티띠씨의 딸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난 14일 달서구의 한 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저체중에 호흡곤란 증세까지 보여 급히 파티마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원티띠씨는 지금까지 달서구 본리동 이주여성쉼터에서 몸을 추스르느라 열흘째 생이별을 했다.

출산 후 아이를 처음 만나러 왔지만 걸음은 무거웠다. 원티띠씨는 출산 후 며칠간 악몽에 시달렸다고 했다. 시댁에서 자신을 내쫓고 아이들마저 빼앗는 꿈이라고 했다. 파티마병원 2층 신생아실 한가운데 이르자 그녀는 간호사에게 "아기를 보러 시댁에서 왔었냐"부터 물었다. "당신이 처음"이라는 말에 그녀는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기는 아직 이름도 없어 엄마 이름인 '원티띠, 2360g'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붙이고 있었다. 간호사는 "신생아들은 보통 3.2kg 안팎인데 이 아기는 많이 작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꼬박 10개월을 뱃속에서 키웠는데도 아기가 작은 데는 이유가 있다며 원티띠씨는 콧등을 찌푸렸다. 주루룩 눈물이 흘렀다.

한국으로 시집 와 감금되다시피 살아온 1년 8개월이었다. 베트남 음식이 먹고 싶어도 오로지 김치와 밥만 먹어야 했다. 결혼이민여성을 위한 단체와 모임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당연히 말을 나눌 친구도 없었다. 전화요금 때문에 휴대폰은 발신정지를 당해 베트남 집에 전화도 제대로 못했다. 오히려 농사 짓는 부모님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지난해 8월 첫째딸을 낳고 둘째를 임신했지만 시댁에서는 출산을 불과 열흘 앞두고 그녀를 내쫓았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이혼 절차까지 밟기 시작했다.

공원에서 우연히 베트남 이주여성을 만나 쉼터를 소개받지 않았다면 출산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출산은 했지만 문제는 병원비. 지금까지 나온 병원비만 300만원 남짓인데 아기가 '호흡곤란증후군'도 함께 앓고 있어 좀더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말이 어설펐던 그녀는 갑자기 기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크나큰 모정은 언어의 장벽마저 아무렇지 않게 넘을 수 있다는 듯이.

"빨리 한국말 배워 일하고 살겠습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 미용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아이를 살려주세요."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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