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빨간색 지붕들이 새하얀 함박눈에 덮혀 조용히 잠들어있는 그림책 속의 어느 마을을 꿈꾸었다. 그런 예쁜 마을의 예쁜 집에만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러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빨간 굴뚝도 없고, 양말을 걸어둘 멋진 크리스마스 트리도 없는 못생긴 아파트 단지까지 산타할아버지가 올리 없었다. TV를 보면서 다른 나라 어린이들은 모두 그런 예쁜 집에 살기 때문에 산타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돼 여행을 하면서, 어릴 때부터 TV에서 보아왔던 크리스마스의 행복한 아이들이 전세계 인구의 5%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나처럼 TV 속의 크리스마스를 대리만족하거나, 크리스마스 이브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배고픈 밤을 보낸다.
2005년 크리스마스, 나는 동아프리카 내륙의 작은 나라 말라위에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은카타베이'라는 말라위호숫가의 시골마을에는 연일 열대 폭우가 쏟아져 온 마을을 누런 흙탕물로 뒤덮고 있었다. 길이 사라져 마을버스가 운행을 멈추고, 아까운 망고들이 흙탕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깡마르고 검은 맨발의 아이들이 진흙범벅의 골목길을 철퍼덕철퍼덕 헤집으며 떨어진 망고를 줍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산타할아버지의 금빛 리본으로 포장한 선물상자 따위는 꿈꾸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망고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까르르' 웃는다. 아이들은 곧 독실한 크리스찬 가족들(말라위인들은 대부분은 크리스찬이다)과 함께 교회에 가서 즐겁게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를 것이다.
나는 게스트하우스의 테라스에 앉아 폭우에 잠긴 골목을 내려다보며 무더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주방의 커다란 냄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쉬마(말라위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옥수수가루떡)'의 구수한 냄새가 테라스까지 풍겨왔다. 스태프들을 위한 점심식사가 준비되나 보았다. 말라위 시골집들은 대부분 부엌이 따로 없이 앞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밥을 한다. 오늘처럼 폭우가 퍼붓는 크리스마스에는 장작불도 없이 어떻게 만찬을 준비할까. 진흙탕물에 떨어진 망고를 씻어먹으며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걸까. 하지만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폭우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첫눈을 맞는 연인처럼 행복해했다.
그 해 말라위는 몇 십년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으로 '국가 재난'을 선포한 상황이었다. 은카타베이의 작은 항구에는 목요일마다 이웃나라 탄자니아에서 옥수수포대를 실은 배가 들어왔다. 모잠비크와 육로를 연결하는 기차도 식량을 실어나르는 비상체제에 돌입하는 바람에 여객기차는 모두 운행이 중단된 상태였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왔는지 올 크리스마스에도 어김없이 외국인 관광객들은 산넘고 물건너 이 작은 아프리카 마을까지 모여들었다. 마을 항구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한적한 호숫가에 이국적인 리조트들이 늘어서 있는데 매년 여기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해변 파티가 '암암리'에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암암리'라는 말이 붙는 이유가 있다. 이 해변 파티는 엄밀히 말해서(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 파티'인데, 지구상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고 싶어하는 전세계 파티족들이 모인다. 그들이 추구하는 '순수한 자유 정신'은 음악과 춤과 알코올과 마리화나로 표현된다고 한다. 그 숨막히는 열정과 히피적인 낭만은 말만 들어도 매력적이다. 만나는 외국인 여행자들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파티에서 만나자"며 인사를 한다. 현지의 아프리카인들조차 자신들의 작은 마을에 그런 유명한 파티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설레어 한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곳을 찾아 그 유명한 파티의 리조트까지 가게 되었다. 리조트는 아직까지 조용했고 파티를 준비하는 아프리카인 스태프들만 조금 신이 나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산악지방의 고산마을에서 아낙들이 내려와 있었는데 그녀들이 소중하게 껴안고 있는 작은 보따리들이 다 파티족들에게 팔 마리화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얻어피우기 위해서 온 인근 마을의 젊은이들까지 리조트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외국인 파티족의 하룻밤 이벤트 때문에 한 끼 식량도 부족한 고산마을의 아낙들은 옥수수나 감자 대신 마리화나를 키우고, 담배 한 가치 살 돈도 없는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이 마리화나에 취해간다. 소수의 행복이 다수의 고통 위에 일구어지는 잔인한 삶의 법칙에 문득 몸서리가 쳐졌다. 아직도 커다란 지구 대부분의 마을, 그 대부분의 집, 그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에게 선물보따리 가득한 행복한 크리스마스는 TV 속에 있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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