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에는 '황금박쥐'라는 만화영화가 인기였습니다. 아틀란티스 유적의 신비한 관에서 부활한 황금박쥐는 인간들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홀연히 나타납니다. 괴물이 나타나 시가지를 파괴할 때 소녀 매리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황금박쥐 도와줘요." 이어 검은색 망토를 두른 황금박쥐가 하늘에서 나타나 악당 괴물을 무찌르고는 유유히 사라집니다. 해골 모양으로 생긴 황금박쥐는 외모상 그리 호감가지 않는 캐릭터였지만 묘한 끌림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코흘리개이던 시절, 보자기를 날개 삼아 두르고 주제가를 부르며 황금박쥐를 흉내내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황금박쥐는 늘 극의 후반부에 나타납니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TV만 틀면 나오는 예능 엔터테이너와 달리 콘서트에만 집중해 신비주의를 구사하는 가수 같습니다. 당시 인기남성중창단 '봉봉 브라더스'가 부른 극 주제가에도 그 점이 나타납니다. '황금박쥐 어디 어디 어디에서 오느냐 황금박쥐. 빛나는 해골은 정의의 용사다. 힘차게 날으는 실버 배턴. 우주의 괴물을 전멸시켜라. 황금박쥐. 어디어디에서 오느냐 황금박쥐. 박쥐만이 알고 있다.'
느닷없이 빛바랜 만화영화 이야기를 꺼낸 것은 꼭 필요할 때만 나타나주는 영웅 황금박쥐 같은 존재가 아쉬워서입니다. 요즘 우리네 정치판 리더들의 존재감이 너무 두드러집니다. 그것도 부정적인 쪽으로만. 해서는 안 될 말 골라서 하는 것 같고, 비관과 낙관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발언으로 불신을 자초하고 위기를 증폭시킵니다.
우리 몸을 보아도 건강한 신체 부위는 평소에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겁니다. 탈이 났을 때서야 신체는 통증 신호를 보내 존재를 알립니다. 문제가 생겼으니 신경 좀 쓰라는 SOS인 겁니다. 현대 문명은 굉장한 복잡계입니다. 규모가 커질수록 특정 분야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특히 실물경제 및 금융 분야의 경우 워낙 복잡다단해서 국내외 여러 변수가 예측 범위를 넘어선 영향을 끼칩니다.
"주식 사두면 1년내 부자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주식은 귀신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발언은 적절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발언으로 파문이 일자 여권은 "실제로 지금 주식을 사라는 것보다는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밀고 나가면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 달라"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기실 대통령이 주식 사라 한다 해서 따라할 사람은 이제 없겠지요. 그는 이미 대통령 후보 시절 "취임 첫해에 지수 3천이 될 것"이라고 잘못 예언했으니까요.
우리나라는 이미 정치가 경제를 선도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닙니다. 일인당 국민소득 200~300달러 하는 빈민국도 아닌 마당에 정치가 경제를 이끈다는 식의 성장 이데올로기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대선 바람이 불던 지난해 후반에는 세계적으로 거품 경제에 따른 과잉 유동성 위기감이 고조될 때였습니다. 경제를 연착륙시켜 해외발 충격을 최소화할 복안을 마련해야지, 747공약·고환율 정책 같은 성장 드라이브를 표방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올 초 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던 날, 여권 출신의 한 노 정객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아마도 오늘이 그의 임기 중에 가장 행복한 날일 거야." 그말에 십분 공감합니다. 큰 권한에는 큰 책임이 따르니까요.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황금박쥐형 리더십이 그립습니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