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여인의 향기(1992)

달콤한 매혹…生의 그 향기를

왜 하필 '여인의 향기'일까.

주인공이라야 장님이 된 퇴역 장교와 인생의 첫 고난을 겪는 고교생, 둘뿐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여인이 간간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연일 뿐이고 여인이 주제도 아니다. 거기다 향기는 또 뭔가.

영화가 수준 이하였다면 '호객 행위'로 비칠 수 있는 제목이지만, 이 영화는 제목은 참으로 탁월한 은유를 담고 있다.

우선 주인공 둘의 형편을 보자. 프랭크는 엘리트 장교다. 탁월한 심미안에 철학적이며 시적이다. 군인의 우격다짐 이미지와 정반대다. 그는 어느 날 장님이 된다. 군인으로서 생명도 끝나고, 삶의 의욕도 없다.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그에게 삶이란 절절한 외로움과 어둠뿐이다.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것.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려고 한다.

고교생 찰리는 심성이 착한 학생이다. 어느 날 악동들이 교장 선생님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범행현장을 목격한다. 학교는 발칵 뒤집혀 범인 색출에 나섰고, 목격자인 찰리를 윽박지른다. 범인들을 말하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는 것이다.

둘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역경을 맞는다. 이제까지 쌓은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무기력을 느낀다. 하나는 삶의 의미가 없고, 하나는 삶의 의미를 지킬 힘이 없다.

수컷의 시선으로 보면 여인은 가장 원시적이며 역동적인 생명력을 가진 삶의 의미이고, 애착의 대상이다. 프랭크에게 필요한 삶의 의미가, 여인으로 은유된다.

프랭크가 정복을 차려입고 권총을 관자놀이에 대자 찰리가 고함을 지른다. "당신에게는 인생이 있잖아요?" "인생? 무슨 인생? 나에게는 어둠뿐이란 말이야!" "하지만 당신처럼 멋지게 탱고를 출 수 있고, 스포츠카를 잘 모는 사람은 본 일이 없단 말이에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탱고 장면이다.

옆자리의 근사한 여인(가브리엘 앤워)에게 접근한 프랭크가 춤을 신청한다. 장님인 줄 알면서 의아해 하는 여인은 프랭크가 리드하는 춤에 빠져 멋진 탱고를 추게 된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된 춤곡이다. 남미의 거칠고 생명력이 넘치는 이미지가 박혀 있는 춤이다. 서로의 다리를 끼고, 몸을 맞대고 추는 춤이라 처음에는 외설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이때 나온 곡이 카를로스 가르델의 'Por Una Cabeza'란 곡이다. 영화에서는 매혹적인 선율만 나왔지만, 가사가 있는 버전에서는 경마로 재산을 탕진한 한 도박꾼의 비참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제목도 '간발의 차이'라는 뜻이다.

프랭크의 총구에서 뿜어져나올 총알처럼 짧은 시간 엇갈리는 운명의 차이, 찰나의 순간에 갈라놓는 절망과 삶의 의욕이 아닐까.

시인 박진형은 시 '당신과 탱고를'을 통해 왕성한 삶의 욕구를 건져올리고 있다. 뒤엉킬수록 더 멋진 탱고, 갈증의 혓바닥을 적시는 달콤한 당신의 향기, 마르지 않는 샘물과 풀밭처럼 안온한 당신의 젖가슴에 파묻혀 차라리 깨어나지 말았으면… . 이것이 달콤한 삶의 매혹이 아니냐, 이것이 한 편의 반전(反轉) 드라마가 아니냐,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삶이 아니냐,

희한하게 화가 손파도 몸의 율동을 형상화했다. 따로 본 한 영화에서 시인과 화가가 같은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은 늘 신기한 일이다.

손파는 탱고에 몸을 실은 율동과 동선을 캔버스에 그려놓았다. 언뜻 보이는 장밋빛은 여인의 청순하며 고혹적인 색이고, 검은 부분은 프랭크의 꽉 닫힌 마음이라 해석해도 될 듯하다. 이리저리 일렁이는 움직임, 무질서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간혹 뒤엉켜버린 우리 삶을 보여주고 있다.

시와 그림은 지금이라도 당장 누군가에게 "탱고를 추실래요?"라고 손을 내밀고 싶은 충동을 갖게 한다. 짙은 탱고의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장미향의 당신을 맡고 싶다. 여인의 향기, 삶의 향기, 나의 향기… .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1992)

감독:마틴 브레스트

출연:알 파치노, 크리스 오도넬, 가브리엘 앤워

러닝타임:157분

줄거리:퇴역 장교 프랭크 슬레드(알 파치노)는 맹인이며 시적인 분위기와 철학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삶에 의욕을 잃은 인물이다. 가족들이 모두 추수감사절 여행을 떠나고 그도 이제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엄한 교육으로 잘 알려진 고교의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넬)가 괴팍한 그의 동행자가 된다. 최고급 호텔과 식당, 리무진 사이를 오가면서 괴팍한 성격의 슬레드를 돌보는 작업이 시작되는데 찰리에게는 생소한 경험이 된다. 즉 여자의 모든 것을 알아버리는 초능력적인 힘을 말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고독감과 죽음의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안 찰리는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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