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재&문화] 표지석 관리 유감

저명한 근대건축사학자 한 분이,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서울은 보존해야 할 건축물은 모두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은 도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제대로 보존되어야 할 대상물들은 마구잡이로 다 헐어내고 그 자리에다 면죄부라도 찾는 양 표지석 하나 달랑 세워놓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씁쓰레한 개탄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인가 서울지역뿐만이 아니라 근대시기의 흔적을 간직한 어느 도시를 가건 여기저기 길거리마다 '무슨 터'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잔뜩 세워져 있는 풍경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표지석이 서울의 길거리에 등장한 것이 1985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20년을 훌쩍 넘긴 시절의 일이다.

처음에는 서대문 터와 같은 역사유적지와 역사인물의 탄생지가 중심이 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근대시기에 역사사건의 현장이 되었던 곳까지 설치대상이 크게 확대되었다. 요즘에는 문인, 화가, 음악가 등 유명인사들의 집터와 활동공간까지도 그 대상이 되는 추세에 있다고 전해 듣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지석의 설립주체도 다양해 서울시,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와 같은 곳에서 주로 이 일을 맡았으나, 최근에는 각 구청 단위의 관공서에서도 독자적으로 관내 유적지를 발굴하여 표지석 설치를 확대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표지석들은 무엇보다도 역사문화유적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자부심을 갖는 방편이 되기도 하고, 여느 보행자들에게조차도 한번쯤 역사현장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므로 나름의 유용성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지석들이 잘 관리는 되고 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게 '그렇다'고 말할 정도는 되지 못하는 듯하다.

표지석의 설치장소가 과연 그 자리가 맞으며 또한 표지석에 새겨진 문구는 오류가 없는지 하는 정도의 역사고증문제는 내버려 두더라도, 표지석 자체의 관리실태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수준은 되지 못하고 있다.

표지석이 고물하치장이나 되는 양 그 주위에 잔뜩 쓰레기봉투와 물건 따위를 쌓아두거나 무슨 공사 때에는 그 위에다 공구통이나 간단한 공사자재를 올려두는 것이 예사이고, 견인차량 안내문까지 표지석 위에다 버젓이 붙여놓은 곳도 종종 목격된다. 그리고 심지어 한번 설치된 표지석이 인근주민들에 의해 임의로 옮겨지는 때도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정기적인 모니터링의 도입은 물론이고 조례제정 등의 방법을 통해 표지석 관리에 대한 종합적인 지침이 서둘러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유적 표지석들은 대개 설치상의 편의 때문인지 실제의 현장과는 상관없이 인접한 도로변에 설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러한 편차를 감안하여 정확한 현장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방법도 함께 고려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느 도시에 어떠한 역사문화유적 표지석들이 설치되어 있는지 그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가령 문화재청에서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목록과 위치에 관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듯이, 전국 각처에 흩어진 표지석들의 현황에 대해서도 그러한 장치가 있다면 역사탐방객들에게 상당한 편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유적과 건축물도 잘 보존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들어선 표지석조차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두 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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