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기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과학은 전쟁기계로 돌변할 준비를 하고 있다. '히틀러의 3제국'은 독일과학의 천국이자 인류의 지옥이었다. 프리츠 하버, 베르터 폰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히틀러 치하에서 활동했던 그 유명한 과학자들은 '악마와 계약'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 이 책은 히틀러 치하의 나치과학, 즉 독일과학의 빛과 그림자를 추적함으로써 과학, 나아가 여타 학문이 처한 환경과 위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은이 존 콘웰은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특히 1920∼1950년대를 집중 연구한 과학사학자이다. 그는 역사 속에서 벌어진 중요한 과학윤리 논쟁을 소개하며 과연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이 책 '히틀러의 과학자들'은 말 그대로 히틀러 치하에 살았던 근대 과학자들과 그들이 개발한 과학기술 업적에 관한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 과학의 중심은 유럽이었고, 그 중에서도 독일과학이 으뜸이었다. 괴팅겐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현대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독일의 기초과학 수준은 세계 정상이었다. 당시 독일의 카이저빌헤름 연구소(지금의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세계 과학기술을 이끌었고, 이곳 출신의 과학자들은 노벨 과학상을 휩쓸었다. 양자 물리학 혁명을 이끈 막스 플랑크가 좋은 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나치체제를 겪으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히틀러 체제 아래서 독일 과학은 여전히 번영을 구가했으되, 글라이크샬퉁(획일화) 정신에 의해 타락과 왜곡, 변질을 겪어야했다.
히틀러와 독일 국수주의자, 또 그들에게 동조한 과학자들에 의해 독일 과학은 안락사와 단종, 인종 위생학 등의 도구로 전락했다. 또 독가스로 대표되는 독일화학과 독일식 수학, 인종 위생학의 근간이 된 생물학과 각종 기술이 발전하게 되는데 지은이는 여기에 동원된 과학자들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지은이는 특히 히틀러 치하에서 수많은 과학자들이 위험하고도 특수한 선택의 상황 아래 놓였고 그들의 갈등과 결정은 당시의 인류는 물론이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핵폭탄 개발 과정과 양자 물리학의 발전 과정을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핵폭탄 개발과 관련해 당시 독일과 유럽, 그리고 영국과 미국, 소련으로 대변되는 연합국의 미묘한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독일의 과학자들(막스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등)은 왜 핵폭탄 개발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견했을까. 미국은 어떻게 핵폭탄을 개발할 수 있었을까? 지은이는 당시 독일이 핵폭탄보다는 그들이 앞서 있던 여타의 과학기술만 활용해도 충분히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독일 과학자들은 핵폭탄 개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지은이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이다. 지은이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팜홀' 녹음 테이프에 담긴 진실을 들려준다. 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가 주고받은 미공개 편지들도 공개한다. 전후 미국과 소련이 독일의 과학을 약탈해 가는 과정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보면 과학자들은 전쟁 후 자기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추악한 태도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레나르트와 슈타르크처럼 나치에 열정적으로 동참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단지 과학 분야에 일했을 뿐인 사람들로 과학을 비정치적이며 중립적인 영역으로 여겨 표면상으로 도덕적·정치적으로 나치즘과 거리를 둔 사라도 있었다. 나치에 열렬히 동조했던 레나르트, 슈타르크에 비하면 하이젠베르크나 오토 한은 범죄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이 핵폭탄 프로그램을 사보타주함으로써 히틀러에게 저항했다는 주장까지 계속 흘러나왔다. 그러나 억류된 독일 과학자들이 나눈 팜홀 테이프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핵과학자들(그들 중 상당수는 독일로부터 추방당한 과학자들이다)보다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
지은이는 또 전후 미국과 소련이 독일의 과학을 약탈해 가는 과정을 통해 독재체제든, 민주체제든 어느 진영의 과학자도 역사의 진실 앞에 쉽사리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만약 미국이 자신들이 탈취한 전리품이 나치와 연관되었는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무자비한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독일 과학자들과 다른 나치 범죄자들이 공모를 지적하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미국은) 오직 독일 과학과 과학자들을 약탈하는 데만 눈이 벌게져 있었을 뿐이다. 바이에른에서 미군에 검거된 (독일과학자) 폰 브라운은 몇 주 지나지 않아 자신이 엄선한 120여명의 로켓 과학자들과 함께 미국의 유도 미사일 연구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525쪽-
누가 영웅이고, 누가 악당인가? 이 책은 과학은 언제라도 전세계를 파괴할 준비가 돼 있으며, 오늘날 과학은 나치시대 이상으로 전쟁수단으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과학을 바탕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지구전체의 파멸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639쪽, 2만9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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