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줄로 읽는 한권]필론의 돼지-세 사람

지사, 노예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

제대 군인들이 군용열차를 타고 귀향하는 길이다. 기차 안에서 만난 훈련소 동기는 벌써 모멸적인 군 생활을 잊었는지 과거를 과장해 제 자랑에 여념 없다.

"선임하사도 내게는 꼼짝 몬했능기라. 쌀말이라도 얻어 갈라카믄 내 눈치를 바야 하잉까. 토요일 일요일은 산 너머 주막에서 안 살았나. 쌀이고 라면이고 내 쓰는 건 언 놈도 타치 몬했능기라."

기차 안에서 떠들어대는 이야기는 대개 그런 이야기였다. 그는 잠을 청할 요량으로 눈을 감았다. 아슴푸레 잠이 들려던 순간 갑자기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독기 어린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이, 땅개(육군) 쌔끼들아."

검은 각반(특수부대쯤으로 보면 된다)을 두른 현역 하나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뒤이어 다른 각반 하나가 나타나 그를 말렸다.

"아서, 여기는 제대병 형님들이다."

"제대 좋아하네. 왕년에 제대 한번 안 해본 놈 어딨어? 이 새끼들한테도 거둬들여."

"어이, 임 하사. 한번 봐 주라. 삼년 시집살이 이제 눈물 씻고 콧물 닦고 돌아가는 길이야."

"안돼, 새꺄. 어떤 놈은 엉덩이에 못이 박이도록 맞고도 아직 13개월이 창창한데, 어떤 놈은 말랑말랑 엉덩이로 비실대다가 제 집으로 기어들어?"

이윽고 대여섯명의 각반들이 객차 안으로 들이닥친다. 그러자 말리던 각반도 못 이기겠다는 듯 용건을 꺼낸다.

"형님들 미안합니다. 고생하는 후배들 위로하는 셈 치고 동전 한푼씩이라도 술값 좀 보태 주십시오. 절대로 공짜로 받지는 않겠습니다. 어이 나×× 한곡 불러봐라."

각반 하나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 그 노래를 들은 대가로 술값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험악한 분위기에 눌린 제대병들이 100원짜리 동전을 내놓는다.(1970년대니 제법 쓸 만한 돈이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10원짜리 동전을 건넨 모양이다.

"야, 너 정말 사람 거지 취급할 거야?"

노래가 중단되고 욕설이 터진다. 그리고 우물우물하는 소리, 철썩, 퍽 하는 소리가 들린다. 10원짜리 동전을 건넨 제대병이 각반들에게 봉변당하고 있다. 부당한 처사에 객차 한쪽이 수런거리지만 검은 각반들의 매서운 눈길에 객차 안은 조용해진다. 이윽고 기분 좋은 목소리가 터진다.

"아이고 형님 고맙습니다. 어이, 이 형님한테 술 한잔 드려. 아우들을 위해 센다이(천원)를 내셨다."

쓸개 빠진 제대병 하나가 마음먹고 상납을 했다. 이어서 전염병처럼 천원짜리를 내고 술 한잔씩 받아 마시는 제대병들이 몇몇 더 나왔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징수는 갑자기 제동이 걸렸다. 창백한 얼굴에 깡마른 제대병 하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검은 각반들과 꼿꼿이 맞서고 있다.

"내가 돈을 내야 할 이유가 없소."

"이 새끼, 노래를 공으로 들으려는 수작이군."

"그 노래 도대체 누가 신청했소? 내게는 안면 방해밖에 안 됐소."

주먹질과 발길질에 카랑카랑하던 목소리의 제대병은 주저앉고 말았다. 헌병이나 공안원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다수의 제대병들은 100원짜리(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를 내고 위기를 모면했다.

객차 안은 하나의 작은 세상이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 시류에 편승한다. 돈 내기를 거부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맞선 제대병은 시류 편승을 거부한 사람이다. 그의 투쟁은 영웅적이지만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가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다만 객차 안의 비극은 아니다.

세상의 변화에 동화하는 것도 생존방식이다. 천원짜리를 낸 제대군인은 변하는 세상에 즉각 영합했다. 때때로 '노예근성'으로 명명되는 이 즉각적인 변신은 자유와 자존을 포기하는 대신 생을 보장받는다.

시류에 편승하지도 맞서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다. 다수의 제대병들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남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동전을 내고 위기를 모면한다. 이들은 징계(폭행)를 당하지도, 그렇다고 찬양(술잔) 받지도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 이들은 지사의 비극도 노예의 고통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는 한편 이들은 천원을 낸 제대병을 경멸한다.(대중은 대체로 그렇다.)

갑자기 객차 안 분위기가 변했다. 제대병 한명이 결사항전을 선언했고, 군중심리에 편승한 다수의 제대병들이 각반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100명이 넘는 제대병들이 대여섯명의 각반을 죽도록 두들겨 팬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제대병들은 그날 사건을 어떻게 말할까? 모르기는 해도 100원짜리를 냈던, 그래서 폭력과 술잔 어느 쪽으로부터도 '유예'됐던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적 투쟁을 떠벌릴 것이다. 각반들로부터 받은 모멸을 슬쩍 빼고, 두들겨 팼던 이야기만 할 것이다.

각반들에 맞섰던 지사는 비극을 맞이하고, 천원을 냈던 노예는 지난날을 잊고 새로운 세상에 금방 적응할 것이다.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던 다수의 사람들만이 지난날을 과장되게 떠벌릴 따름이다. 모두가 '화려한 과거'를 떠벌리고 있음에도 '인류역사'가 화려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더불어 세상이 진작에 '결딴'나지 않은 것 역시 어정쩡한 태도로 판결을 '유예'받은 사람들 덕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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