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자비를 앞장서서 보여주었고 ....... 가난한 자에게는 빵을 나눠주고 벌거벗은 자에게는 옷을 나눠주어 그 나라는 평화와 번영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그의 다스림은 오래가지 못했다. ....... 시련은 너무도 가혹했기에 삼 년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자는 사악하기 그지 없었다. (별아이 중) '오스카 와일드의 환상동화' 오스카 와일드 지음/이은경 옮김/김성실, 노준구, 박혜정, 이애림 일러스트/이레/273p/20000원
동화의 사전적 정의는 '어린이를 위해 동심을 바탕으로 지은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동화는 대체로 순수하고 서정적이며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동화는 심청이를 왕비의 신분으로 만들어주며, 놀부를 결국 패가망신시킨다. 미덕의 보상이나 악덕의 응보가 질서정연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동화가 교훈적인 주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녀와 나무꾼'같은 동화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이야기에서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식의 박정한 교훈을 도출할 수 있고, '속여서 결혼하면 이혼당한다'라는 삭막한 응보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지간하면 우리는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동화를 그런 식의 모토로 소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서 얄팍한 교훈을 얻는 대신, 어떤 감성의 전이를 경험한다. '예정조화'롭지 못한 이야기의 부조리 속에서 우리 자신의 현실을 어렴풋이 돌아보는 것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쓰기 직전 30대의 오스카 와일드는, 이러한 '교훈 제로'의 '환상 동화'를 9편이나 세상에 내보냈다. 한스는 평생 남을 위해서 착하게 살지만 어이없이 개죽음을 당한다. 작은 새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붉은 장미꽃을 피워내지만, 결국 꽃은 의미없이 버려지고 만다. 별아이는 천신만고 끝에 왕국을 얻지만, 그는 곧 죽고 왕국은 사악한 자의 손에 넘어간다. 이 9편의 동화는 대개가 이런식이다. 와일드는 '그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식의 엔딩을 뒤틀면서, 동화 속에서 익숙한 교훈을 찾으려드는 사람들에게 지옥같은 미로를 준비해놓고 낄낄거린다.
그러나 교훈극을 비꼬는 치기가 와일드의 동화가 가지는 유일한 미덕은 아니다. 작가는 결코 응당하달 수 없는 불꽃놀이같은 인생의 허무를 집요하게 그려내면서, 그 속에 슬퍼서야 비로소 완성될 지독한 유미의 코드를 숨겨 놓았다. 그래서 와일드의 동화는 아이들의 머리맡에 두기에는 다소 어둡지만, 삶의 무위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는 적당히 블루지한 침대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 진심은 닿지 않고, 항의는 묵살되고, 순정은 허사가 되어버린 우리 자신의 가련한 인생이, 냉소의 동화 속에서 거울처럼 아름답게 반사되는 탓이다.
교훈적이거나 반교훈적인 책은 없다. 다만 잘 썼거나 못쓴 책이 있을 뿐이다. (서문 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지음/이선주 옮김/황금가지/396p/10000원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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