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 시대
조선시대 난방 방식은 '온돌'과 '화로'로 대표된다. 그때 그 시절엔 아궁이에서 장작이나 짚 등을 연소시켜 집 전체를 데웠고,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숯불을 재와 함께 모아 화로에 썼다. 성냥이 없던 시절 화로는 '불씨 보전'을 위한 필수 난방 보조기구. 불씨 보전은 대개 집안 여인네들에게 주어진 의무였지만 불씨가 꺼지면 집안 운세가 나간다는 미신이 여인네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잿불이라고 부르기도 한 불씨는 간직해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제대로 불씨를 보전하지 못한 여인네들은 집에서 쫓겨나는 운명까지 감수해야 했던 것.
◆연탄시대
우리나라의 난방 방식은 난로와 연탄이 쓰이기 시작한 일제시대 이후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우선 난로의 등장이 획기적이었다. 장작을 수시로 넣어 줘야 하는 불편함은 여전했지만 실내에서 온기를 유지하기가 이전보다 엄청나게 쉬워진 것. 하지만 장작에서 연탄으로 난방 연료가 바뀌기까지는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연탄의 효시는 19세기 말 일본 큐슈 지방의 모지시(門司市)에서 사용된 '통풍탄(通風炭)'또는 연꽃연탄(蓮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방에서는 주먹만한 크기의 석탄에 구멍을 내 나무 대신에 사용했고, 구멍이 뚫린 모양이 연꽃열매 모양을 닮아서 연꽃연탄이라 불렀는데, 1907년쯤 제조기가 발명되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후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평양광업소에서 벽돌과 비슷한 모양에 두개 또는 세개의 구멍이 나 있는 관제연탄을 제조하기 시작했지만 거의 모든 물량이 일본인 가정을 중심으로 공급돼 우리 국민 대부분은 여전히 나무 땔감을 사용했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 연탄 생산이 본격화돼 일본인이 경영한 부산 삼국상회가 9공탄 생산에 성공했던 193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국민에게 연탄이 대중화한 건 해방 이후부터였다. 한 때 재계서열 10위까지 부상했던 대성그룹의 고 김수근 명예회장이 1947년 5월 대구 칠성동에 국내 최초의 민족자본 연탄회사인 대성산업공사를 설립하면서 마침내 연탄 전성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 이 같은 연탄은 가정용으로 19'23'31공탄, 공업용으로 41'42'49공탄으로 진화를 거듭하다 1978년 이후 22공탄으로 통일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50년간 우리나라 업체들의 연탄 생산량은 5억6천만t에 달했으며 금액으로는 무려 30조원에 이른다.
◆석유'도시가스'전기 시대
한때 전체 난방 수단의 80%를 차지했던 연탄 시대는 1980년대 말부터 저물기 시작한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당시 신문 1면에 심심찮게 등장할 만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데다 경제수준이 향상됐고, 석유'도시가스 보일러 개발이 잇따른 때문이다. 이미 198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전기 난방기구 또한 빠른 속도로 연탄을 대체했다. 사람들을 연탄가스와 등유 냄새로부터 해방시킨 전기난로는 청결과 열효율, 편리성 측면에서 이전 시대의 난방기구를 압도한 것. 2000년대 이후엔 전기 온풍기가 한국 난방시장을 장악한다. 상하 자동 풍향조절장치에 타이머'자동안전장치가 달려 있고, 리모컨만 누르면 알아서 작동하는 편리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첨단 난방시대에도 서민들의 연탄사랑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불황 때문이다.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이기동(45)씨는 "사무실에 전기 온풍기를 틀었던 지난해엔 이틀에 1,2만원꼴로 난방비가 나갔는데, 연탄난로를 들인 올해부터는 하루 2천800원(연탄 8장)밖에 들지 않더라"며 "요즘 같은 불황엔 편리함보다 비용 절감이 먼저다"고 말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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