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에 칼집을 넣고, 반으로 갈라 소금물에 밤새 뒤집기를 하며 절이곤 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그냥 절임 배추를 주문해서 김장을 하자고,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여닫기에 편리한 김치냉장고도 한 대 더 들여놓기를 바라셨다.
이제 곧 여든이신 어머니. 젊은 시절엔 민첩하기 그지없으신 분이었다. 세상 정보에 밝은 분이셨지만, 그 시절 내게 부엌일과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의지만은 별로 없었다. 당하면 다 하게 되는 것이 밥 하고 살림 하는 일인데 뭔 걱정이냐며, 김치와 된장과 밑반찬을 늘 만들어서 보내주셨다. 그런 어머니도 이제 차츰 미각이 무디어지시는지, 음식을 해도 옛날처럼 딱 떨어지게 맛깔스런 맛을 내지 못하신다. 김치냉장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광까지 드나드는 게 귀찮다며, 편리한 최신형 김치냉장고를 원하기까지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그 수고도 덜어드릴 겸, 직접 김장을 해 볼 생각이었다.(부끄러운 일이지만, 여태 한 번도 내 손으로 김장을 한 적 없기에) 그런데 12월로 접어들자마자 곧 젓갈을 구하는 등 어머니의 분주한 양념 준비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때다 하며 또 두 손을 놓고, 이번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엄마표 김치를 먹는다.
노모에게 김장을 맡긴다고 꾸짖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리 생각지 않는다. 앞으로 어머니가 몇 번이나 더 내 김장을 해 주실 수 있을 것인가. 그 수고로움이야말로 딸을 향한 내 어머니의 자긍심이며, 기쁨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홈쇼핑에서 사먹으면 되는데 냉장고 비좁게 뭔 김치를 종류대로 다 담그냐고 짜증을 냈을 나였겠지만, 이젠 그런 말도 하지 않는다.
배추김치, 무김치, 총각김치, 백김치, 물김치, 보쌈김치, 굴김치, 갈치김치, 오징어김치, 무말랭이, 고추장아찌, 깻잎김치, 콩잎김치, 파김치, 지난해부터는 마당에서 캔 고들빼기까지 어머니의 김치 목록 속에 들어가 있다.
이 많은 김치를 잘 보관해서 먹으려면 김치냉장고 한 개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엌이 비좁지만 어머니의 소원대로 김치냉장고를 부엌에 한 대 더 들여놓았다. 김치냉장고는 김치의 적숙 발효 상태를 장기간 유지시켜 주겠지만, 그것은 이미 나에게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니다. 노모의 정이 발효되어 숨 쉬는 모성의 절대공간이다.
겨울 저문 하루, 김치를 담그는 어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쭉쭉 찢은 겉절이를 한 입 가득 얻어먹는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김치를 담가 먹어야 할 날도 오겠지만, 지금은 그저 어머니 곁에서 엄마표 김치를, 오래오래 맛볼 수 있기를 빌어 본다.
백미혜(시인·화가·대구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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