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발표된 '제44회 이용기능장시험'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가장 눈에 띈 인물은 이선희(66)씨다. '이용부문 박사학위'로 일컬어지는 기능장시험에 최고령 합격과 함께 실기'필기를 한꺼번에 통과한 유일한 응시자였기 때문이다.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가 요즘 이용인들 사이에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경산이 고향인 이씨의 이용 경력은 50여년. 17살이던 1959년 경남 진해의 한 이용소에 취직한 것이 이용업에 발을 디딘 계기다. "먹고 살기 힘들어 입하나 덜기 위해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나가야 했습니다. 당시 취직은 연줄로 이뤄졌습니다. 해군을 제대한 뒤 진해에 살고 있던 작은 아버지가 단골 이용소에 취직 자리를 알아 봐주었습니다. 누가 중국음식집 배달원 자리를 소개를 해주었으면 지금쯤 중국음식점 사장이 되어 있겠죠."
이용소에 취직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소와 공동 수돗가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다. 1년쯤 지나 새로운 견습생이 하나 들어오면서 안마와 면도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안마와 면도를 하면서 1년 정도 지나니 아이들 머리 손질을 제게 맡겼습니다. 그렇게 3년 걸려 기술을 배운셈이죠. 월급이라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숙식제공에 가끔 용돈을 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1962년 이용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대구로 올라와 옛 경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 인근의 한 이용소에 취직해 1965년 군 입대 전까지 일을 했다. 제대 후에는 매일신문사 위치에 있었던 효성이용소에서 근무했다. 매일신문사를 지날때마다 주마등처럼 지난 세월이 지나가는 이유란다.
1969년은 이씨에게 매우 특별한 해로 기억된다. 그해 결혼을 했으며 현 YMCA 건물 1층에 자신의 이름으로 이용소를 개업했기 때문. 1970~80년대 이용소는 최대 호황을 누렸다. 대구시내에서 4개 이용소를 한꺼번에 운영했던 시절도 있었다. 계산2가 동원이용소, 약전골목 종로이용소와 함께 서구청과 서부정류장 인근에도 자신의 이용소가 있었다.
"영업시간과 요금 자율화 전에는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만 영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후 8시까지 오는 손님만 받았습니다. 하루종일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회용, 전기면도기가 없었기 때문에 면도하러 이용소에 많이 왔습니다. 벌이도 괜찮았죠. 신혼 초 경찰관'연초제조창'국수공장 근무자들과 함께 같은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제 월급이 가장 많았습니다."
지금은 이용업이 많이 쇠퇴했지만 전성기 때는 이용소에 이발사'준이발사'면도사'옷장관리사 등 종업원만 10여명이나 됐다고. 대구의 이용소는 호황기 2천500개에서 현재 1천700여개로 줄었다. 이씨도 현재는 모두 정리하고 남산4동에서 하나만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 이용업계에 불황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지금에 비하면 불황도 아니었습니다. 젊은 손님들을 미용실에 빼앗기고 이용업이 하락세로 돌아선 이유는 1980년 초 퇴폐문화를 받아 들인 것 때문입니다." 그는 이용업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3남매 가운데 두 명이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낼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고 고객관리를 잘만 하면 한달에 300만원은 충분히 벌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이용사회 중앙회부회장, 대구시협의회장 및 중구지회장을 맡고 있는 이씨는 매사에 열심인 사람이다. 특히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이 있다. 1997년부터 5년동안 경북대 명예대학을 다녔고 한참 어린 후배들과 기능장 시험을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구가 이용도시라는 지역적 특성도 기능장 도전에 기폭제가 됐다. 대구는 전국에서 기능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며, 4명의 명장 가운데 2명이 대구 사람이다.
"오랫동안 '대구시이용기능경기대회'를 준비하면서 남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제 자신의 능력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 늦은 나이에 기능장시험을 보게 됐습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만만치는 않았다. 돋보기를 끼고 3개월에 걸쳐 필기시험을 준비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실기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기술이 너무나 부족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실기시험을 앞두고 처음 이용기술을 배운다는 각오로 한 개 6만5천원하는 가발을 50여개 소비하며 기술을 연마했다.
이씨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이용사가 되겠다'는 생각에 15년 전부터 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지난 1일에는 중중장애인사회복지시설인 경산의 한 시설 봉사활동 공로로 경산시장으로부터 표창장도 받았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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