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때도 그렇지만 크리스마스에는 더욱 더 사랑이 하고 싶다
일년을 묵어,
이젠 텁텁해져버린 가슴을
채 다하지 못한 말을 담아둔 빈 가슴을
편지 봉투처럼 열어두고
그 안에 내가 꿈꾸던 사람이 들어와
사랑하는 사람과 나만이 머무는 그 작은 공간에서
크리스마스같은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다
- 김종원의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하고 싶다' 중에서.
◆영화 속의 한 장면, 가실성당
깜빡이는 전구로 치장한 초록빛 전나무와 하얀 눈, 캐럴과 산타할아버지, 루돌프사슴. 크리스마스에 떠오르는 관념적 이미지다. 물론 '올해의 마지막 국경일'로만 반기는 고달픈 영혼도 있겠다. 하지만 어디 시인뿐이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즈음에 사랑에 목말라하는 것은.
그런 이들에게 칠곡 왜관읍 낙산1리 가실성당은 제격이다. 이름부터 너무 곱다. 아름다운 마을, 가실(嘉室)! 종교가 있든 없든,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이곳에 서면 사무친 사랑이 이뤄질 듯하다.
고풍스런 성당은 빛바랜 주황색 벽돌만큼 오랜 역사를 증언한다. 1895년 우리나라에서 11번째,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는 계산성당에 이어 두번째로 설립됐다. 1924년 완공된 현재의 성당과 옛 사제관(전시실)은 2003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됐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절충된 형태의 설계는 서울 명동성당과 대구 계산성당 등을 지은 박도행(V.L. Poisnel) 신부가 맡았다.
가실성당은 우리나라에서는 흔치않게 안나 성녀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안나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마리아의 어머니. 성당 안에 모셔진 안나 모녀상은 성당 신축때 프랑스에서 수입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다.
50대로 보이는 안나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한 얼굴이다. 한국의 어머니와 별반 느낌이 다르지 않다. 무릇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다행히 가실성당은 한국전쟁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낙동강을 둘러싼 전투는 온 산하에 처절한 상흔을 남겼지만 남과 북이 번갈아 가며 병원으로 썼던 성당은 오롯이 남았다. "제 고향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유적들이 부서졌지만 저희 성당은 전쟁마저 비켜갔습니다. 주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8년 전 가실성당에 부임한 현익현(바르톨로메오) 주임신부의 40년 묵은 유창한 한국어 설명이다.
가실성당을 가기 전에는 영화 한 편을 보면 더 좋을 듯하다. 권상우·하지원씨가 출연한 영화 '신부수업'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예쁜 성당이 있었나 싶었다"는 영화제작자들의 고백이 절로 피부에 와닿는다. 가실성당 054)976-1102.
◆무흘구곡과 수도암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김광균의 외인촌 중에서)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경북의 서남쪽 끝, 수도산 가는 길에서는 옛 선비의 풍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한강(寒岡) 정구(1543~1620) 선생이 성주 수륜면에서 김천 증산면 수도리까지 빼어난 풍광에 반해 '무흘구곡'(武屹九曲)을 남긴 곳이다. 1곡부터 5곡은 성주에, 6곡부터 9곡은 김천 수도계곡 일대에 있다.
청아하고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6곡 옥류동(玉流洞), 7곡 만월담(滿月潭), 8곡 와룡암(臥龍巖), 9곡 용추(龍湫)를 지나면 '하늘 아래 첫 동네' 수도리 마을이 나타난다. 속인들의 범접을 애써 막으려는 듯, 일부러 직각에 가깝게 방향을 뒤튼 해탈교가 인상적이다.
늘쩡거리며 조금 더 올라가면 산 정상 부근에 수도암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법당 앞마당에 서면 연꽃을 빼닮은 가야산 연화봉이 선경이다.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859년, 도선국사가 절을 창건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7일 동안 춤을 추었다는 얘기가 낯선 객의 얼굴에도 미소를 띠게 한다.
이 절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우선, 산 너머 거창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됐다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보물 307호)이 전하는 이야기. 불상을 다 만들어놓고 보니 너무 커 어떻게 수도암까지 옮길까 모두들 고민할 때 홀연히 한 노승이 나타나 불상을 등에 업고 절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아뿔싸, 노승은 절에 다 와서 그만 칡덩굴에 걸려 넘어질 뻔한다. 노승은 산신령을 불러 인근에 칡덩굴을 모두 없애게 했고 지금까지도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없다고 한다.
약광전 아래쪽에 자리잡은 나한전 역시 영험함을 자랑한다. 법당 쪽으로 기울게 자라 지붕을 손상시키곤 하던 늙은 느티나무가 어느날 뿌리째 뽑혀 이상하게 여긴 스님들이 알아보니 나한상 어깨에 느티나무 잎사귀가 붙어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절 밑에서 힘들게 공양미를 짊어지고 오는 신도 앞에 동자승이 나타나 대신 짊어지고 올라갔는데 나한전 동자승 어깨에 볏짚이 묻어 있었다는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수도암 한 관계자는 "옛 이야기를 모두 믿을 수는 없겠지만 애를 못 낳아 애태우다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린 뒤 아들을 얻었다는 노보살님들이 꽤 많다"며 "신도들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오는 편"이라고 전했다.
웅숭깊은 골 아래 청암사도 둘러보길 권한다. 비구니스님들의 수도 도량인 청암사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1689년 폐비된 뒤 내려와 복위를 기원하며 4년을 머문 곳이기도 하다. 특히 절 입구에 있는 우비천(牛鼻泉)은 '마시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 귀를 솔깃하게 한다. 소가 왼쪽으로 누워있는 와우형인 절터에서 코 부분에 해당되어 항상 촉촉히 샘물이 솟아난다는 것. 재물을 멀리하는 스님들은 샘 앞을 지날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도 했다지만 속세의 사람에게는 반가운 샘이다. 하지만 길어갔다간 재물운이 쇠한다 하니 너무 욕심부리지 마시길.
◆군위 신비의 소나무
구곡용추(九曲龍湫)
구곡회두갱위연(九曲回頭更■然) 아홉굽이 고개 돌려 지난 일을 생각하니
아심비위호산천(我心非爲好山川) 내 마음 산천이 좋아 이러함이 아니로다
원두자유난언묘(源頭自有難言妙) 오묘한 진리를 어이 말로 다하리오
사차하수문별천(捨此何須問別天) 이곳을 버려두고 어디 가서 물어야 하나
한강 선생은 아홉 굽이를 다 돌아본 뒤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남겨둔 채 다시 속세로 돌아 가야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던 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쉽기만 하다면 내친김에 군위를 둘러보자. 일연국사가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를 지나 영천쪽으로 가다보면 908번 지방도에서 잘 생긴 낙락장송(落落長松)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고로면 학암리 속칭 성황골 뒷산에 있는 '신비의 소나무'다.
수령 500년(높이 7m, 둘레는 4.5m, 폭 21m)의 이 영특한 소나무는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 등이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신기하게도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그 덕에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거뜬하게 합격한 사례도 있다고 하며 매년 음력 7월에는 마을청년들이 동제를 올리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 소나무는 명함도 읽나 보다. '신비의 소나무'에는 성공과 행복을 기원하는 명함 수백장이 솔보굿마다 장식처럼 꽂혀 있다. "대구에서 왔는데 꽤 영함하다고 하데요.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다들 찾겠지요." 오늘도 소나무는 곤댓짓을 하며 불쌍한 중생들을 맞고 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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