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느림의 찬양

생명은 쉼속에서 물기가 오르고/작가들은 고독속에서 영감 얻어

몇 년 전인가, 퐁피두 센터에서 이라는 전시가 행해지고 있을 때, 경주 선재미술관에서는 이 열렸다. 물론 사전에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현대 사회의 속도감에 대한 상념이 현대예술의 이슈가 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 때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경주 전시장을 방문하였다. 지금도 의미심장하게 기억되는 것은 한 일본 작가의 작업이다. 영상작업이었는데, 암실 벽면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맞은 편에는 관중들이 앉아서 볼 수 있도록 의자를 준비해놓았다. 그러나 20여분을 앉아 있어도 스크린에는 마냥 희뿌연 하늘만 비쳐지고 아무런 이미지도 음향도 없다. 학생들은 그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다들 나가버렸다. 한 30여분 되어서야 희뿌연 하늘 한 자락에 새 한 마리가 빠르게 날아가는 흔적이 보인다. 작업은 그게 다였다. 의자에 앉아서 끝까지 지켜보았던 나는 새가 날아간 흔적을 오래도록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조급증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을 하지 못한다. 이제는 30여분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시간이 없다. 30분이란 시간은 서비스 교환 가치로 환산하면 다 돈이 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일본의 미술가는 에서 우리의 의식을 잠시 돌아보게 했던 것이다. 느리게 살아야 그래도 하늘을 보고 새의 흔적도 음미한다. 우리의 머리 위에 늘 창공은 열려 있지만, 우리는 실상 일 중독과 분망함 속에서 스스로의 시'공간에 갇히고 닫혀있는 삶을 살고 있다.

벨기에의 루벵대학 교수로서 1936년 자유학술원 입회 때 강연을 묶은 자크 러 클레르크 신부의 (1986년 분도출판사 펴냄)이라는 책은 그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저자가 강연한 때로부터 이미 70여년이 지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지만, 게으름을 찬양하는 그의 해학과 역설은 오히려 오늘의 시대에 더욱 깊은 지혜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시대는 치열한 생활을 자랑하지만, 치열한 생활이란 실상 소동의 생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 삶이 제대로 인간적이려면 러 클레르크 신부의 말대로 '느림'이 있어야 한다. 위대한 업적이나 크나큰 기쁨은 뛰면서는 이루어질 수도 음미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쳐서 이젠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쓸데없는 조바심 때문에 선뜻 손을 빼지도 못한다.

정작 사람이 무엇을 감상하려면 멈추어야 하듯이, 무엇을 생각하려 해도 잠시 멈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듯 멈춤과 쉼과 한가함 속에서 모든 사념과 생명은 물기를 얻는다. 예술가들에게 있어 때로 섬광처럼 생각이나 걸작이 피어나는 것도, 이미 오래고 한가로운 잉태기와 고독의 시간이 그에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심지어 예술가들조차도 혼자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각종의 집단에 끼여 앞뒤 돌아볼 것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작업실에서 내적인 깊이를 다지는 것보다 회합이나 모임을 통해 정보를 얻고 사회적인 대응과 순발력을 키우는 데 더 주력한다.

예술판이 그럴진데 정치판은 말할 것도 없다. 금방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돈과 권력인지도 모르면서 '바람 위에 바람을 포개는 꼴'로 치달아 간다. 기록을 깨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경주차 안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도 볼 수 없듯이, 더 뛸수록 덜 보게 된다는 이치를 다들 망각하고 있다. 쫓기며 살다가 문득 초겨울 섬진강변에서 생각한다, 물은 역시 서두르지 않아도 모두 큰 강으로 흘러들고 또 바다와 만난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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