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봉급쟁이들의 목숨이 위태롭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세계 각국의 글로벌 기업 근로자들도 하루에 수백명씩 잘려나가는 판에 대한민국 근로자들 신세는 오죽 처량할까?
더욱더 비극적인 사실은 갑(甲)인 완성품업체와 상대할 때 항상 을(乙)이 될 수밖에 없는 부품소재기업이 대구경북지역 산업현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세계 대공황 앞에서 지역 봉급쟁이들은 언제 '아웃(Out)'될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그야말로 직장의 우열이 더욱 뚜렷해지는 계절. 학창시절, 사람이 잘나고 못나고는 '앨범 단체사진'에서 판가름난다고 했건만 이 시절 사람의 됨됨이는 얼마나 생명줄이 튼튼한 직장에 다니느냐는 것이 됐다.
연말 송년회 시즌, 친구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임마, 니(너)는 걔안나(괜찮니)?"
◆"됐다…, 묻지마라!"
"어느 금융회사는 최근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하면서 1963년생 이상 직원에 대해 일괄 사표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잔인한 것 아닌가? 1963년생이면 이제 겨우 45세다. 지금 나가면 뭐하겠는가? 애들이 아직 중고교에 다닐텐데 자녀는 어떻게 키우나?" 대구시내 한 금융회사 지점장은 "남의 일 같지 않다"며 한탄을 했다.
"임금피크제에 걸리는 1954년생이 올 연말 회사를 떠나지만 그 아래 연령층에 대해서도 추가로 퇴직신청을 더 받을 것 같다. 경기가 안 좋으니 회사 방침이 그렇게 섰을 것이다. 대한민국 월급쟁이 중에 퇴직 이후를 생각하고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가면 정말 막막하다." 대구시내 한 시중은행 고참 직원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기업은 곧 구조조정이 시작될 예정이지만 당장 곳간에 돈이 떨어진 대구경북 중소기업들은 식구들을 이달부터 본격적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대구 최대 산업단지인 성서공단을 관할하는 대구북부고용안정센터. 이곳은 이달 들어 "잘렸으니 실업급여를 받아야겠다"며 신청을 한 사람들이 하루 평균 130여명씩 몰려들고 있다. 지난달엔 하루에 60, 70명 수준이었지만 불과 2, 3주 사이에 2배 가까이 폭증한 것이다.
대구북부고용안정센터 남택조 소장은 "사용자가 일자리를 계속 유지해주면 정부가 재정지원을 통해 근로자 임금의 3분의 2까지 대신 지급해주는 제도가 있지만 중소 규모 하청업체들은 일감이 줄어들면 3분의 1 비율의 사용자 자부담 임금도 못 맞추는 것 같다. 때문에 일감이 떨어지면서 작은 업체들은 해고를 본격화한 것 같다"고 했다.
머잖아 규모가 있는 업체들도 '칼질'을 시작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대구에서는 '대기업'으로 통하는 차부품업체들에서조차 해고 소문이 나오고 있다. '어느 업체가 00명선을 정리할 것 같다' '어느 업체는 벌써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등의 소문이 공단 주변을 휘감고 있다.
안정된 직장으로 불리는 금융권도 예외는 아니어서 농협은 11일부터 연령에 관계없이 명예퇴직을 받기로 하고 신청접수에 들어갔다.
지난 10일 대구경북지방통계청이 발표한 대구경북지역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대구와 경북지역 실업자는 각각 4만8천명과 2만6천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대구는 1만명(25.2%), 경북은 2천명(9.4%)이 늘었다. 실업률은 대구 4.0%, 경북 1.8%로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해 대구는 0.8%포인트, 경북은 0.1%포인트 상승했다.
◆"자슥아, 나는 걔안타(괜찮다)"
요즘 송년회에서 단연 '우상'으로 떠오르는 직종은 교사·공무원이다. 특히 부부 교사, 부부 공무원은 선망의 대상이다.
대구에 근무하는 한 행정고시 출신 기관장은 "20여년 전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신부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부러워하는 혼사였다. 공직에 있는 사람과의 맞벌이 결혼생활은 당시만 해도 기피 대상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가장 부러움을 받는 커플이 됐다. 공무원은 상대적으로 직장생활을 오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금혜택을 받는다는 장점이 크다"고 했다.
공직자들은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사기업에 비해 약하다고 알려져 왔지만 김대중 정부 이후 꾸준하게 이어진 공무원 처우개선 정책 덕분에 임금이 많이 올라갔다. 대구시에 따르면 대구시청 공무원의 경우 직원 1인당 연간 평균급여(입사 14년쯤된 7급 직원 기준)가 여러 가지 수당을 포함해 3천만원 후반대다.
상대적으로 재무구조가 건실하다고 평가받는 대구지역 상장기업 중에도 3천만원대 후반 연봉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공무원들은 고용과 임금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것이다.
1995년 취업정보전문업체 선두주자 중 하나였던 리크루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대학생들의 희망직종 1위는 방송국 PD, 2위는 대기업 기획조정실, 3위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이었다. 공무원은 11위였고 교사는 14위였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인기직종은 사기업이었고 공직은 선호직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8월 취업정보전문업체인 인크루트 조사에서는 공무원이 대학생들 직업선호도 1위였다. 지난 9월 한국고용정보원이 내놓은 조사결과에서도 대학생들의 선호직업 최상위권에 교사와 공무원이 나란히 들어갔다. 사회복지혜택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약한 우리 상황을 감안할 때 '직장에서 잘리면 인생이 끝장난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인크루트 이광석 대표는 "취업시장에서 고용안정성이 높은 직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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