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재발견 100년"
'삼국유사'를 비롯한 역사문헌에 멀쩡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주 석굴암을 두고서 일본인들이 처음 이것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한다면 이것만큼 가소로운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얘기는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근대 시기에 폐허처럼 남아 있던 석굴암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여기에 더하여 예술적 가치가 크게 부각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까지 등재될 만큼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석굴암은 도대체 누구에 의해,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났던 것일까?
이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면, 석굴암이라는 존재가 일본인들에게 처음 포착된 것은 1907년 내지 1908년 무렵이었다고 알려진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전쯤의 일이다. 어떤 자료에는 우편배달부가 우연히 이것을 찾아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자료에는 경주우체국장으로 있던 어느 일본인이 사냥하러 토함산에 올랐다가 이것을 발견하였다고도 적고 있다.
그리고 1909년 4월에는 한국통감부의 부통감이던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에 직접 오른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석굴암을 공식적으로 탐방한 가장 빠른 기록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에 관한 사진자료는 1910년에 발행된 '조선미술대관'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그런데 부통감이나 되는 최고의 권력자가 그저 소문만으로 그 높은 곳에 직접 행차했을 리는 만무하고, 사전에 이에 관한 준비와 조사가 틀림없이 있었을 것임을 감안하면, 일본인들에 의한 석굴암 탐방은 1908년께에 이미 본격화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소네 부통감이 석굴암에 오른 1909년 그해 초겨울에는 이른바 '조선고적조사사업'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동경제대 건축과의 세키노 타다시 교수도 이곳에 올랐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바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되는 다수의 관련 사진자료와 더불어 "조선에 남아 있는 조각품 가운데 제일류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남긴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석굴암의 명성이 서서히 알려지던 무렵 석굴암을 통째로 들어 서울로 옮겨가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이러한 발상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이었으므로 이 계획은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석굴암의 고달픈 수난사는 이것으로 그치질 않았다. 이러한 계획이 무산된 것에 무슨 미련이 남았던 것인지 1912년 11월에 석굴암에 직접 등반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의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사다케였다.
테라우치 총독의 석굴암 탐방이 낳은 가장 큰 폐해는 그 이듬해부터 시작된 석굴암 해체수리공사였다. 겉으로는 조선예술의 최고걸작을 영구히 보존한다는 명분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석굴암 전체에 콘크리트를 완전히 덧씌워 놓은 것은 매우 고약한 결과를 불러왔다.
이것이 오히려 석굴 내에 습기가 차오르는 부작용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 번번이 스팀세척작업을 벌여야 했으므로 보존은커녕 훼손이 더 가속화하였던 것이다. 지난 1962년에 우리 손으로 다시 보수공사를 벌여야했던 것도 바로 애당초 일제강점기의 잘못된 해체수리공사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제가 함부로 손을 대기 이전의 석굴암 원형을 그나마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몇 장의 사진자료를 통해서만 겨우 구경할 수 있단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에 만약 스스로 나라를 지켜내는 힘이 그토록 허약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을 석굴암의 모습은 틀림없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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