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백합꽃 다시 그리다

창의성과 개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래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지만, 그럴수록 더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요즘이다.

우리 안의 창의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 것일까.

어느 뇌과학자가 말했다. "우리집 강아지 이름이 '난다'입니다. 성까지 합하면 '신난다'가 되지요. 아주 기쁘고 흥겨운 것을 신명난다고 하는데 '자기 안의 신이 드러나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신나게 할 때라야 영감이 오고 창의력이 발휘됩니다."

오랜만에 인사동 화랑가로 나들이를 했다. 개인전 초청장 한 장을 받았고, 그 전시회의 주인공이 만든 그림 '꿈 못 이룬 여인'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올해 76세인 외숙모님은 그림을 시작한 지 11년이 되었다. 65세에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과, 자녀들은 잘 키워 모두 독립시켰으며, 유명 출판사의 검증된 시집을 출간한 적도 있는 여류 시인의 삶을 살았다. 이른바 직장과 육아와 집안 살림과 남편 내조와 자기실현을 동시에 해낸 슈퍼 우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주변사람들은 그녀의 노년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분에게도,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 있었던 것인지, 그 연세에 첫 개인전을 열면서 화단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림 '꿈 못 이룬 여인'은 흰 백합꽃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머릿속엔 밥숟가락, 가계부, 화장품, 안경, 가위, 책, 찻잔, 양말, 술병, 촛불, 전화기, 자동차 같은 일용품들이 가시관처럼 이마를 짓누르며 덧씌워져 있는, 한 현대여성의 초상화였다.

퇴직 후 11년 동안,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빼고선 온전히 그림에 투신했다는 그녀의 작품은 화랑 2개 층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그림들은 신선했고, 어떤 기성 화가보다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형상화시키고 있는, 빼어난 독창성이 엿보여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프닝 때 그녀가 말했다. "그림 속에 매몰되면서, 나는 긴 시간을 짧은 시간으로 만드는 일에 재미를 느꼈어요. 그런 재미의 시간 안에서 나를 잊고 사는 것이 더욱 재미있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재미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나는 그런 삶을 원해서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그랬다. 뇌과학자가 인간 뇌의 잠재력과 창의력의 발현을 자기 집 강아지 '신난다'를 통해 말해주었듯이, 늦깎이 화가의 그림 창작의 비밀 역시 재미와 몰입에 있었던 것이다. 꿈을 가질 때, 우리의 창의력은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가 있다.

꿈을 이룬 그림 - 그녀의 '꿈 못 이룬 여인'은 반토막이 난 펀드나 가계 살림 때문에 억장이 무너진 후라도, 입안에 재갈 물리듯 흰 백합꽃을 다시 그려 넣을 터.

백미혜 시인·화가·대구가톨릭대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