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 도시들은 문화에 주목하고 있다. 초점은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고 도시민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문화의 고유 기능이 아니라 경제성이다. '도시 문화가 돈이 된다'는 발견은 순식간에 도시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쇠락한 도심을 되살리는 데 문화예술만한 재료가 없다는 인식은 세계적인 추세가 됐다.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을 도심에 설치하고 전시 공간을 늘리고, 거리 공연을 다양하게 펼침으로써 도심에 문화예술의 향기가 가득하게 만든다. 향기는 사람들을 도심으로 모으고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인다. 상권이 되살아나면서 도심은 버려진 공간에서 매력적인 고부가가치 생산기지가 되는 것이다.
◆문화가 지역을 바꾼다
10만명이 넘는 예술가가 사는 세계 최고의 예술도시 미국 뉴욕. 문화예술에 의한 도시의 변모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준다. 1970년대 미술가들이 창고 건물을 작업실로 활용하기 시작한 맨해튼 남쪽의 소호 지역. 창조의 열정이 일대를 덮으면서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는 유명 거리가 됐다. 작업공간과 전시장 사이로 명품 매장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땅값과 건물세가 치솟았다. 이를 못 견딘 작가들은 값싼 공장지대를 찾아 서쪽의 첼시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곳 역시 같은 과정을 되풀이했고 작가들은 몇 년 전부터 다시 브루클린 공장지대로 이동하고 있다. 도시 슬럼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브루클린이었지만 이제는 문화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문화가 한 지역의 이미지는 물론 경제적 가치까지 변화시키는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국내 도시들도 앞다퉈 문화도시를 표방하고 나섰다. 서울시는 올 들어 '컬처노믹스(Culturenomics)'의 비전과 전략을 내놓으며 도시의 부가가치 창출과 경쟁력 향상을 위해 문화를 원천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1세기에는 문화가 곧 경제고 경쟁력이며 세계 도시들은 이제 산업이 아니라 문화로 경쟁한다"며 "문화가 돈이 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창작 여건과 문화예술 시장, 공공의 지원이 어우러지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주목받는 대구문화창조발전소
지난달 2일 대구시 중구 수창동 KT&G 부지 내 별관 창고. 평소 일반인들의 발길이 좀체 닿지 않는 이곳에 사람들의 열기가 후끈했다. '아트 인 대구 2008-이미지의 반란'이라는 주제로 창고 건물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 널찍한 공간과 4m가 넘는 높은 천장, 담배 창고로 쓰이던 오래된 건물과 예술작품이 묘하게 어울려 시민들의 가슴에 독특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전시는 대구시가 지역 미술의 전통을 돌아보고 동시대미술의 다양한 양상을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생산 기능을 다한 산업공간을 문화공간으로 되살려 침체된 구도심에 새로운 에너지를 일으키기 위해 시가 조성하는 '대구문화창조발전소'의 가능성을 진단하는 첫 공식행사여서 의미가 더했다. 62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14일 동안 진행된 이번 전시는 "대구 도심에 문화의 향기를 피울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구시는 이곳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예술활동을 수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창작에서부터 제작과 배급, 소비가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 작가들에게는 다양한 실험과 장르 간 융합을 통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시민들에게는 단순한 전시 관람이 아니라 예술의 창조 과정까지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대구시 김대권 문화예술과장은 "공구골목과 집창촌이 남아 있는 도심의 대표적 슬럼지역을 대구 문화예술의 역량과 욕구를 폭발시키는 거점으로 만든다는 방침"이라며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각계의 전문가들이 문화창조발전소의 가능성과 장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도심 재창조의 큰 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도시 성공하려면
대구 문화창조발전소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역 근대산업유산을 활용한 예술창작벨트 조성'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내년부터 예산이 본격 투입된다. 창작공간, 카페와 아트숍, 전시·공연장, 교육시설과 시민체험공간 등이 들어선다. 무난하게 추진될 경우 2011년 완전한 모습을 시민들에게 보여줄 예정이다. 일방적인 문화 소비공간으로 인식되던 대구 도심에 창조의 열정을 심는 첫 단추를 꿰게 되는 것.
그러나 문화를 도심재창조의 에너지로 활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창작의지에 불타는 작가들은 공공의 지원을 대단히 경계한다. '누군가로부터 지원을 받으면 간섭도 함께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에게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지 못하면 도심에 문화 역량을 응집시키기 힘들다. 지원하되 운영은 최대한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작가들의 생각이다. 특히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게 된다면 문화창조발전소는 예산만 잡아먹는 괴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끌어들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지역의 전통과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 문화란 존재하기 어렵다. 이를 뒷받침하는 힘은 주민들로부터 나온다. 주민들 스스로 문화 창조와 향유의 주인공임을 인식하고 벌어지는 모든 행사와 일들이 지역 공동체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김윤환 대구문화창조발전소 추진위원(문래비주얼아티스트 네트워크 대표)은 "전세계적으로 도심재생에 문화와 예술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오로지 경제논리만 작동한다"며 "예술가가 모이면 고부가가치가 생겨 지역경제가 활성화하지만 도심재생으로 이어지려면 시민들이 도심에서 문화예술을 공기처럼 만끽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김재경·서상현기자 사진·이채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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