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가 힘들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기를 축원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습니다." 친정고향인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집에서 자수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이 시대의 어머니인 김원선(81)씨는 16살에 평산 신씨 파종가 맏며느리로 시집와 5남매(4남1녀)를 낳아 키워 모두 출가를 시켰다. 박봉의 공무원인 남편과 더불어 근검절약을 통해 아들 딸 빠짐없이 대학교육도 마치게 했으며 모두들 반듯하게 자라 이제는 중견 사회인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1994년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에 내려가 살 때 생전에 그이가 '수예를 해보라'는 말이 떠올라 시작하게 된 게 벌써 10년 세월이 넘었군요. 그 새 자식들 효도도 받을 만큼 받았던 터라 '옳거니! 이제 내가 할 일은 수예밖에 없구나' 하고 이 일에 매달리게 된 거죠." 엄한 아버지 밑에서 5남매가 클 때는 되도록 따뜻하게 대해 주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그래도 못 다한 어머니의 사랑을 김씨는 고운 비단에 수를 놓아 그 마음을 대신하게 됐다.
독실한 불교신도인 김씨가 수를 놓기 시작하면서 먼저 구상한 게 260자의 반야심경 한 글자 한 글자를 검은 실로 손톱크기로 수를 놓아 커다란 부처 불(佛)자를 새긴 액자를 만드는 것. 5남매에게 줄 5개 액자를 만드는데 꼬박 1년하고도 2개월이 걸렸다. 한 땀씩 수를 놓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절 1배를 올리는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정성이 하늘에 닿은 걸까. 액자를 선물한 후 아들네와 사위에게 각각 사법고시 합격과 직장에서 승진하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큰 작품들을 수 놓은 틈틈이 베갯잇용 국화며 보자기용 목단 등 소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자식들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올 초 김씨의 작품을 모아 단출한 전시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늘 건강하고 자기 자리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자식들이 제대로 잘 커준 것 같아 무엇보다 기쁜 마음으로 살아간답니다." 팔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견하게 자란 자식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표정에는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자상함이 넘쳐난다. 김씨의 내리사랑은 손자손녀에게도 건네져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8폭 병풍을 수놓아 한 폭씩 나눠주기도 했다.
"아직은 건강이 허락하고 눈도 밝아 자수를 하는데 힘이 들기는커녕 자꾸 재미가 생겨요." 어머니의 사랑을 골고루 나눠주고 싶기에 김씨는 수예작품을 보통 5개씩 만들 때가 많다. 또 수 놓을 때마다 김씨는 마음에 생각해 둔 자수의 주인에 대해 온 정성을 다해 앞날이 평탄하고 바라는 바가 이뤄지기를 기원한다. 그럴 때면 어릴 적 모습과 성장해가던 과정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가기도 한다.
"자수는 무엇을 수 놓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담겨 있어 굳이 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장래 포부를 펼치라'는 제 마음을 전달 수 있어 좋아요." 요사이 김씨가 주로 비단에 새기는 자수는 힘차게 물 속을 노니는 잉어의 모습과 사군자이다. 잉어는 예부터 등과의 상징물이며 사군자는 올 곧은 선비정신을 대변하다.
그래서 대학입시를 앞둔 손자에게 잉어와 사군자 자수가 놓인 작품을 선물하는 게 즐거움이다. 그 속에는 말로선 다 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사랑과 헌신이 빼곡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손녀들에게는 대국과 소국이 함께 피어있는 자수를 선물한다. 그 속에는 성장한 후 결혼하면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라는 할머니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묻어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의 샘 일터이다. 김씨의 이러한 헌신적 사랑이 친척들에게 알려지면서 현재 함께 수를 놓으려는 친척아낙네 서너 명이 김씨의 친정고향집을 자주 찾고 있다.
"살다보면 인생 고비길이 왜 없겠어요. 그럴 때 제가 준 자수를 보며 아들이나 손자 손녀들이 힘을 얻으면 더 할 바람은 없습니다." 자수를 놓은 김씨의 따뜻한 손길 하나하나는 자식을 지키는 든든한 후원자요 손자손녀의 영원한 수호천사에 다름 아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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