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말연시 나들이, 놓치면 후회할 경북 명소] ③동해안권

▲ 죽변 대나무숲은 울진이 자랑하는 비경의 하나다. 죽변등대, 드라마세트와 나란히 있다.
▲ 죽변 대나무숲은 울진이 자랑하는 비경의 하나다. 죽변등대, 드라마세트와 나란히 있다.
▲ 영덕 괴시마을과 인량마을. 선비들의 낭랑한 책 읽는 소리가 흙담 넘어 들릴 듯한 전통마을이다.
▲ 영덕 괴시마을과 인량마을. 선비들의 낭랑한 책 읽는 소리가 흙담 넘어 들릴 듯한 전통마을이다.
▲ 벽산 김도현 선생이 순국한 도해단이 대진1리 바닷가에 외로이 서 있다. 사진 정우용기자
▲ 벽산 김도현 선생이 순국한 도해단이 대진1리 바닷가에 외로이 서 있다. 사진 정우용기자

때론 사무치게 겨울 바다가 그리울 때가 있다. 황량한 해변의 고독과 끊임없는 파도의 생명력과 은밀한 지난여름의 추억이 들릴 듯 말 듯한 울림으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바다를 찾는 이유는 제각각 다를 테지만 바다 하면 떠오른 건 역시 동해안이다. 특히 '내면의 계절'인 겨울에는 오밀조밀한 서해나 남해보다 거친 동해가 제격이다. 다행히 동해는 지척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림처럼 기다리는 바다로, 겨울나그네가 되어 떠나보자.

■울진이 감춰둔 비경, 죽변 대숲

경북의 동북단, 울진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보배를 품고 있다. 지하 금강이라 불리는 성류굴, 명승 6호인 불영사 계곡, 관동팔경인 월송정과 망양정, 국내 최대규모인 소광리 금강송군락지, 백암과 덕구의 온천, 소박한 인심이 흥겨운 포구와 은빛 모래밭이 그렇다. 최근에는 민물고기생태체험관, 친환경엑스포공원도 나들이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진귀한 보물이 아주 많다'(蔚珍)는 이름 그대로다.

하지만 오지인 탓에 속인들의 때가 덜 묻은 호젓한 곳도 꽤 숨어 있다. 그 중 하나가 죽변항에 있는 대나무숲이다. 흔히 대나무라면 키가 수십m까지 자라는 내륙지방의 왕대를 생각하지만 거센 해풍을 이겨내고 자란 이곳 대나무는 키가 고작 3m 정도에 불과한 소죽(小竹)이다.

그렇다고 무시하면 안 될 일. 왜적을 막기 위한 화살대 생산용으로 고려시대부터 가꿔왔다는 '뿌리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반도에서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곳(직선거리 217㎞)이 이곳, 죽변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난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댓잎 너머로 들리는 파도 소리도 가히 '명품'이라 부를 만하다. 하늘마저 가린 대나무 터널 아래에서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벗삼아 걷노라면 신선이 따로 없다. 군데군데 마련된 전망대에 올라 굽어보는 경치는 굳이 설명해서 무엇하랴. 울진군은 이곳에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는 점에 착안, '용의 꿈길'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붙여놓았다.

혼자라도 좋지만 죽변은 연인과 함께 가면 더 좋을 듯하다. 대나무숲 오솔길의 초입에 드라마 '폭풍 속으로'(2004년 SBS 방송)를 촬영했던 세트장이 있고 반대편 끝나는 곳에는 경북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죽변등대가 있어 운치가 그만이기 때문이다.

'죽변제일교회'라는 회갈색 나무현판이 걸려 있는 교회의 주황색 지붕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절벽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주인공의 집'은 쪽빛 바다와 절묘하게 어울려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동해를 드나드는 수많은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온 죽변등대도 최근 수리를 마쳐 하얀 외관이 더욱 빛난다. 두 손을 꼭 잡고 사랑의 밀어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절로 콧노래가 나오지않을까. 'NO MORE LONELY NIGHTS, NO MORE LONELY NIGHTS. YOU'RE MY GUIDING LIGHT, DAY OR NIGHT I'M ALWAYS THERE.'(폴 매카트니, NO MORE LONELY NIGHTS)

■순국의 바다, 영덕 대진1리

달콤한 연인의 속삭임도 좋지만 겨울바다에서 절대고독(絶對孤獨)을 맛보고 싶다면 영덕 대진1리 도해단(蹈海壇)으로 오라. 시쳇말로 '죽음보다 더 깊은 고독'이라 하지만 그건 살아남은 자들의 말장난이 아니던가. 망국의 한을 못 이겨 차가운 겨울바다로 걸어 들어가 자결한 벽산 김도현 선생의 숭고한 죽음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대진해수욕장 한쪽에 자리 잡은 도해단은 덩그러니 서 있는 비석과 산수암(汕水巖)이라 새겨진 바위가 전부다. 얼핏 지나치기 일쑤이지만 도로변에 있어 찾기가 어렵지는 않다. 다만 잊혀졌기에 찾는 이가 없을 뿐이다.

본관이 김녕인 김도현(1852~1914) 선생은 영양 청기면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대쪽 같았다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터지자 사재를 던져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10월까지 동해안과 안동·영양을 주무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원래 이름 '道鉉'조차 조상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왜적의 세상에서 쓰는 것은 치욕이라 여겨 '燾鉉'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선생의 기개를 짐작하게 한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는 비밀리에 세력을 규합하다 일제에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또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순국의 뜻을 품었고 부친의 장례를 마친 뒤 산수암에서 결행했다. 선생은 가족에게도 '바다에 빠진 시신을 수습하여 염(殮)하는 것은 뜻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일렀고, 정부에서는 그의 정신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겨울 바다는 분명 누군가에게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시발점일 수도 있다. 저 아득한 영혼의 바닥까지 침잠하다 보면 새로운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옛말에도 극과 극은 통한다 하지 않았나.

마침 며칠 뒤가 선생이 바다에 몸을 숨긴 동짓날이다. 올 겨울 식도락의 즐거움을 찾아, 낭만을 찾아 영덕에 간다면 벽산 선생이 남긴 시 한 수를 읊으며 지사의 높은 뜻을 가족과 함께 되새겨보길 권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않기 때문이다.

我生五百末 조선 오백년 마지막에 태어나/ 赤血滿腔腸 붉은 피 온 간장에 엉켰구나

中間十九歲 열아홉해 나라 위한 일념으로/ 鬚髮老秋霜 머리털과 수염은 서릿발이 되었네

國亡浪末已 망국의 눈물 채 마르지 않았는데/ 親沒痛更張 어버이마저 가시니 가슴이 찢어진다

獨立故山碧 외롭게 서서 보니 옛산만 푸르고/ 百計無一方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은 없다

欲觀萬里海 만리 바다를 보고자 하였더니/ 七日當復陽 칠일 만에 햇살이 돋아서 오네

白白千丈水 희디 흰 저 천 길 물 속은/ 足吾一身藏 이 한 몸을 감출 수 있겠구나

■이끼에 묻힌 세월의 흔적, 괴시·인량전통마을

영덕까지 왔다면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전통마을, 괴시마을과 인량마을을 빠트릴 수 없다. 태백산맥 동쪽 바닷가에는 이처럼 큰 규모의 와가(瓦家)촌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영남 사림들의 본거지였던 안동에 견주어 영해를 '소안동'이라 불렀던 연유를 알겠다.

괴시리는 고려 말의 충신,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마을 이름도 원래 호지촌이었으나 선생이 중국을 다녀온 뒤 중국 괴시(槐市)와 지세가 흡사하다고 해서 붙인 것으로 전해온다. 현재 남아 있는 고택 30여 채는 100~200년 전통을 자랑한다.

괴시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고택은 아무래도 영양 남씨의 종가집이다. 경북도 민속자료 제75호인 이 고택은 정침과 사당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주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옛날에는 영양 남씨 외에도 여러 성이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주민 대부분이 영양 남씨이기도 하다.

괴시리를 나와 드넓은 영해평야를 가로지르는 918번 지방도를 5분쯤 따라가면 인량리가 자리 잡고 있다. 영덕에서는 나라골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은 뒷산의 모습이 마치 학이 나래를 펼친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마침 저녁밥 짓는 연기가 온 마을을 휘감고 있어 정말 학이 날아다닐 것만 같았다.

이 마을이 관심을 모으는 것은 보통 한두 성씨만 모여 사는 일반적인 마을과 달리 여덟개 성씨의 종실(八姓 宗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동 권씨, 재령 이씨 등 종실이 4곳만 남아 있지만 이십대 이상 내려온 큰 종가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기는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성경 나라골 보리말체험학교 대표는 "옛날부터 영해도호부 내에서 최고 명당으로 꼽혀온 터라 주민들의 긍지가 아직도 높다"며 "종가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종택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특별한 체험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마을은 7남 3녀의 아들딸을 모두 훌륭히 키워내고 가장 오래 된 한글요리책 '음식디미방'을 지은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의 흔적이 남아 있어 가족나들이에도 좋다.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 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는 장 부인의 가르침만 배워가도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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