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어느날 독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독도화가 권용섭

'다케시마는 일본 땅.' 이 말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의 화를 일시에 치밀어 오르게 할 망언이 있을까. '독도는 한국 땅'만큼 남과 북, 진보와 보수,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세력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명제가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독도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저 맹목적으로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관념적으로 독도에 대한 당위성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온몸으로 독도를 사랑하는 민족만이 내 땅이라 주장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 지난 10여년간 독도를 그리워하며 독도를 그리고, 세계에 독도를 알려온 화가. '독도화가' 권용섭(50) 화백을 지난 10일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만났다. 그가 독도와 애국심에 대해 목청 높이는 신념 강한 민족주의자일 것이라는 기자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시종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과장된 몸짓도 없었고, 주먹을 불끈 쥐지도 않았다. "애국하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서 그리다 보니 애국이 됐다"는 그의 말이 유난히 귓가에 맴돌았다.

◆눈을 감아도 독도가 보인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대형 독도 그림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동도와 서도, 기암괴석들이 화폭에 모두 담긴 풍경. 화선지 전지에 길이만 5m라니 보기에도 숨이 찬다. "독도 전경을 사진으로 찍으면 전경을 모두 담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독도가 한눈에 보일 수 있도록 섬 뒤편의 엄지바위, 해태바위 등을 앞으로 꺼내서 그렸어요." 서도 위에는 한반도 모양의 풀밭이, 동도 옆에는 그가 발견했다는 '백두산 천지' 바위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물에 잠길 듯 솟아있어 직접 배를 타고 가까이 가야 볼 수 있다는 곳이다. 그는 이 대형 작품을 손가락 굵기의 모필 하나로 3시간 만에 그려냈다고 했다. 보통 서너달은 걸리는 작업이다. 전시장에는 독도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시카고, 뉴욕 맨해튼, 세도나, 페루의 마추피추 계곡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화폭에 담아낸 장엄한 풍광도 걸려있다. 하지만 맨해튼의 빌딩숲에도, 세도나의 기암 절벽에도 묘하게 독도의 형상이 겹친다. "독도가 뇌리에 박혀 있다 보니 모든 풍경을 독도와 접목시키는 습관이 생겼어요. 주제는 실제 모습으로 가되, 멀리 보이는 부주제는 묘하게 독도를 닮은 거죠. 그냥 습관이에요."

그는 수묵으로 크로키를 하듯 빠르게 그려내는 데 능하다. 이른바 '수묵속사기법'이다. 그는 수묵속사기법을 이용해 대형 광목에 독도를 30분 만에 그려내는 퍼포먼스를 펼치곤 한다. 뇌리에 각인된 독도 풍광을 밑그림 삼아 붓과 손으로 단숨에 화폭에 담아낸다. 그가 빠르고 정확하게 그려내는 건 오랜 언론사 경험 덕분이다. 신문 삽화나 스케치를 마감 시간에 맞추려다 보니 자연스레 손이 날래졌다고 했다. 하지만 노력 없이는 되지도 않을 일이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스케치를 하기도 했어요." 사실 그의 직업은 '오지여행화가'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그려낸 그의 스케치북은 수백여권에 이른다. "주로 메모 형식으로 스케치를 하죠. '∧' '∂' 등으로 안개표시, 산 표시, 나무 표시를 하는거예요. 대신 특이한 모양의 빌딩이나 독도 등대처럼 기억하기 힘든 풍경은 자세히 그려요." 기자들이 지렁이가 기어가듯 취재수첩에 메모를 한 뒤 정리하는 것과 닮았다. 그의 수묵속사기법이 각광을 받은 건 1999년 금강산 관광 당시였다. 방송사 기자들이 촬영 금지 구역을 찍었다는 이유로 배에 억류됐을 당시, 그는 화폭에 금강산의 풍경을 낱낱이 담았다. "제가 밥을 먹으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 현대상선에서 전시회를 제안했어요. 4일 동안 그린 게 100여점이 됐죠. 정말 잠도 안 자고 그렸어요."

◆죽음으로 시작된 독도와 인연

독도가 그에게 준 첫 메시지는 죽음이었다. 1977년 8월 스무살의 화가 지망생은 친구와 함께 울릉도행 정기선에 올랐다. 낭만과 혈기로 떠난 독도 스케치. 하지만 독도 관광은 어림도 없었다. 구경이나 해보자 싶어 도동항 부두 옆 암벽에 가보기로 했다. 서성대던 관광객 4명도 일행으로 합류했다. 그는 독도가 보인다는 가파른 절벽으로 기어올랐다. 멀리서 보이는 건 독도 대신 검푸른 파도. 산더미처럼 몰려드는 시커먼 물결을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순식간에 밀어닥친 파도는 다른 일행들을 덮쳤다. 결과는 참혹했다. 친구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함께 갔던 4명의 관광객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됐다.

끔찍했던 기억도 세월과 함께 삭아 내렸다. 그로부터 23년 후,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 산과 하늘과 바다가 어울리는 곳을 찾아 스케치 여행을 다니던 그는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 모리 총리의 망언에 격분했다. 화가로서 독도 풍경을 화폭에 담겠다고 마음먹었다. 독도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한 지 20여일 만에 응답이 왔다. 정부에서 독도 관광을 허용하기로 한 것. 독도 개방 첫날, 울릉도에서 마음 졸이던 그에게 독도가 자태를 드러냈다. "엄청나게 황홀했죠. 30분 동안 독도 순회를 하는데 스케치만 50여장을 했어요. 한반도 모양의 풀밭도 봤고요. 그때 영상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후 그는 4차례나 더 독도를 방문했다.

그림은 그렸지만 보여줄 곳이 없었다. 경북경찰청과 경북도청에 부탁했지만 "독도의 '독'자도 꺼내지 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운좋게도 경찰청에서 '포돌이 문화전시관' 개관 기념으로 '금강산전'을 하자는 제안이 왔다. 그는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약속하고 '독도 초대전'을 열기로 했다. 행사 내용이 언론에 알려졌지만 다행히 전시회는 무사히 진행됐고, 오히려 규모가 커졌다. 그는 한국 내에서만 머물러선 안 될 것 같았다. 첫 해외전시회 장소는 브라질. 부족한 경비는 이과수 폭포를 그린 그림을 팔며 충당을 했다. 세계순회전도 시작했다. 브라질, 미국, 필리핀, 독일 등 세계 10여개국을 돌았다. 2003년에는 평양에서도 독도 전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잦은 해외 전시회가 힘에 부쳤다. 아예 미국으로 가자 싶었다. "5년간 미국에서 20개 주 순회전을 하자고 결심을 하고 미국으로 갔죠. 가족들도 찬성을 했고요." 6개월쯤 지나자 밑천이 바닥났다. 아는 사람도 없고, 도움을 줄 곳도 없었다. 2005년 LA문화원에서 여는 '광복 60주년 기념전'을 위해 한국에 있던 집을 팔았다. "한인단체와, 지역 정치권 인사까지 동참한 미주 최초의 독도 사랑운동이었는데 포기할 수 없었고, 1만5천달러가 넘는 전시회 비용도 감당할 수 없었죠. 덕분에 생활비 부담도 덜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팔았어요."

◆학연은 족쇄, 나는 자유로워

권 화백의 이력서에는 '○○대 미대 졸업'이라는 흔한 이력이 없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탓이다. 중학교 시절, 그는 화선지에 스며드는 먹선에 흠뻑 빠져들었다. 수묵화를 벽에 붙여놓고, 틈 나는 대로 보며 무작정 따라 그렸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잡지사와 신문사 편집부에서 일을 하며 미술계의 대가를 주제로 한 기획 기사를 쓰며 전국을 기행했다. 운보 김기창 화백, 야송 이원자 화백 등 수많은 스승들과 인연도 그렇게 시작됐다. "학교에 다니려니까 운보 선생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학교에 가면 동료가 생기고 교수의 영향을 받아서 필력이 죽는다고 하셨죠. '붓이 선생이다' 그러셨어요."

'누구의 제자'라는 강력한 고리가 위세를 떨치는 예술계에서 학맥도, 인맥도 없는 그는 이방인이자 비주류였다. 누구도 끌어주지 않았기에, 더 죽을 각오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끌어주면 그게 족쇄가 될 수 있어요. 전시회를 하려 해도 선배나 지도 교수의 눈치를 봐야 되잖아요. 그런 게 없으니 교류의 폭이 넓어졌죠." 화가에게는 고정 수입이 없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다. "전화요금을 못 낼 때가 있었어요. 고정수입이 없으니까 당장 작은 돈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 그림을 하나 팔면 석달치 수입이 생기니까 그때 밀린 카드값도 내고 생활을 하죠. 소소하게 써야될 돈이 없을 때 신문사 원고료는 굉장히 소중했죠."

열심히 뛰다 보니 아내도 만났다. 1986년 안동MBC 개국 기념 전시를 준비하면서 전시회를 돕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아내를 만났다. 미술을 전공한 아내와 함께 화실을 냈고, 1년 뒤 결혼에 골인했다. 그의 맹렬한 독도 열병은 가족들에게도 자연스레 전염이 됐다. 부부가 그린 독도 그림으로 세계 순회전을 열었다. 2001년 4월에는 아내와 두 딸, 온가족이 독도스케치 탐방을 했고, 필리핀과 미국에서 가족전을 열기도 했다.

◆독도를 이용하지 말라

독도 그림은 얼마나 잘 팔릴까. 그는 "10여년간 20점 정도를 팔았다"고 했다. 의외로 안 팔리는 셈이다. "제 그림이 비싸요. 또 순회전을 열다 보니 그림을 팔면 다음 전시에 쓸 그림이 없잖아요. 그래서 신경을 못썼죠." 독도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독도의 미적 가치나 예술성이 아니라, 목적에 의해 평가받는 게 아쉽기도 하다. "독도는 반경 300m 안에 높고 낮은 봉우리와 관통석, 기암괴석 등 온갖 풍경이 다 담겨 있어요. 굉장히 미적 가치가 높죠. 제가 의도하는 대로 작품성 있게 독도를 그릴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어떤 작가들은 제가 작가적 고집도 없이 주문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래도 독도 그림을 주문하는 거니까 고맙죠. 독도를 사랑하니까."

그는 "독도운동을 하지 말자"고 했다. 생색내기식 규탄대회나 전시 행정은 그만두자는 뜻이다. "지금 LA에서도 독도 관련 행사를 너무 많이 해요. 외국 공관 앞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한글로 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독도와 별 관계도 없으면서 독도 이름 빌려서 자기 단체 알리려는 관행들이 굉장히 심하죠." 한국 상황도 다르지 않다. "최근 한국에 돌아와 경북도청을 찾았는데 별별 사람들이 다 와서 독도 이름 대고 기부를 요구한대요. 독도가 애물단지가 된 거예요." 그는 독도의 실효적 지배는 문화적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화가는 그리고, 가수는 노래하고, 시인은 글로 독도를 찬양하면 돼요. 외국 여론 주도층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면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거든요. 자연스럽게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야죠." 최근 미국의회도서관에서 독도의 주제어를 '리앙쿠르 암석'으로 변경하려 했던 사건을 보며 후회도 했다. "5년 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전시회를 하려고 했는데 무산이 됐어요. 만약 제가 전시회를 했다면 그렇게 쉽게 일본의 로비에 넘어가진 않았을 거예요." 정부의 미온적인 독도 정책도 아쉽다. 그는 정부가 오히려 일본을 돕고 있다고 했다. "제가 10년 전부터 독도에 나무심기 운동을 하고 물골을 만들고, 유인화 운동을 하자고 했어요. 그게 암석이냐, 섬이냐의 차이잖아요. 그런데 정부에서는 무조건 독도에 못 가게 해요. 거기다가 일본과 한일공동어업협정을 체결해서 분쟁지역처럼 만들고, 또 유인화하자는데 건물을 짓자고 하고. 독도는 자연보호지역인데 건물을 왜 짓습니까. 실질적으로 독도를 지킬 일은 안 하고 전시행정만 하니 문제죠." 그가 원하는 진짜 창작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했다. 지금까지 세계 각지를 돌며 담아낸 수백여권의 스케치북을 작품으로 탄생시킬 일이 남았다. 그는 "독도는 이제 그만 그리고 싶다"고 했다. "독도는 이제 할 만큼 했잖아요. 독도를 또 가고, 감동을 받으면 그리겠지만 그렇게 독도에 매몰돼 있지는 않아요. 미국 20개주 순회전을 다 끝내면 한국으로 돌아와야죠."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권용섭은 누구?=1958년 경북 의성 출생. 한국화가. 1999년 금강산 기행전을 계기로 많이 알려졌다. 금강산의 실제 자태를 독특한 '수묵속사기법'으로 그려낸 100여점의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모리 총리의 망언에 문화적 대응을 할 것을 결심, 독도를 방문해 직접 스케치한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며 '독도화가'로 알려졌다. 미국, 일본, 호주, 브라질, 독일, 페루 등 10여개국을 순회하며 300여 차례에 걸쳐 독도 전시회를 열었고, 북한에서도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2004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 기행을 하며 독도 순회 전시를 하고 있다. 10년 뒤 한국에서 독도미술관을 여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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