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아까워서 못 입은 빨간 내복

나는 증조모님이 계시고 그 아래로 할아버지, 할머니 또 그 아래로 미혼의 고모가 계시는 대가족 집안에서 육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혼자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 보니 가정 경제는 늘 어려웠기에 어머니는 제대로 된 내복 한 벌이 없이 다 낡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헌 내복을 기워서 입곤 하셨다.

그 와중에 증조모님과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고 고모는 시집을 갔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조그만 개인업체에 취직을 했다. 그때는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선물하는 것이 사회공식처럼 되어있어 어린 소견에 할머니 생각은 까맣게 밀쳐두고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사다드렸다. 그런데 다음에 보니 그 내복은 할머니가 입고 계셨고 어머니는 여전히 할머니의 헌 내복을 입고 계셨다. 그러나 나 역시도 가정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했기에 다시 어머니의 내복을 사기란 쉽지가 않았다. 몇 년 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결혼을 하면서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던 빨간 내복 한 벌을 어머니께 사드렸다. 이제는 낡은 옷은 좀 내버리시라고…. 그럭저럭 집안 형편도 내복을 기워 입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몇 해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유품정리를 하다 보니 장롱 속에 내가 사드렸던 빨간 내복이 상자째 그대로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마음 한구석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내복은 어머니 생전 처음으로 얻은 새 내복이라 차마 입지를 못하고 그대로 넣어 두신 것 같았다. 지금 그 빨간 내복은 내가 입고 있다. 아이들은 요즈음 누가 그런 걸 입느냐고 촌스럽게 굴지 말고 제발 좀 버리라고 핀잔하지만 어머니께서 소중히 여겨 모셔 두었던 것처럼 나는 어머니의 그 애잔한 마음이 사무쳐 이제는 낡았어도 쉬이 벗어 내버려지지가 않는다.

김순자(대구 북구 동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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