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섶

외래진료를 받으러 오랫동안 다니시던 할머니가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약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다. 외래용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던 눈길을 할머니한테 돌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네? 언제요?"

"9일 전에 돌아가셨어요. 전라도 남원 선산에 묻고 이렇게 인사하러 왔어요."

10년 넘게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를 위해 약을 타가시던 할머니가 울먹거렸다.

"아들이 대구에 살아서 10년 전 전라도 남원에서 여기로 왔잖아요. 그때 넘어져서 선생님한테 왔었는데 파킨슨씨병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10년을 약을 타먹으면서 그런대로 잘 지냈잖아요."

"8개월 전에 넘어졌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늑골이 부러지고 머리를 다쳤는데 응급구조차가 다른 병원에 보내주어서 그곳에서 치료를 받았잖아요."

"목구멍을 뚫었어요. 폐렴에 걸렸다고 안 뚫으면 안 된다고 해서 뚫도록 승낙했어요. 8개월 동안 말도 한마디 못하고 밥 한 숟가락 못 먹었어요. 그렇게 죽었어요.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죽겠어요."

"24살 때 결혼해서 지금 77세이니 53년을 같이 살았어요. 77세까지 살았으니 나이로는 불쌍하지 않으나 말 한마디, 밥 한 숟가락 못 먹이고 돌아가시게 한 것이 한이 되요."

눈가가 붉어지고 눈물이 글썽거린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면 눈물도 잘 흘러내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제가 아프면 꼭 좀 도와주세요."

들고 온 음료수와 요구르트를 책상 옆에 놓고 진료실을 나가신다. 할머니의 정성이 하도 고마워 들고 온 요구르트를 하나 열고 숟가락으로 떠서 입 안에 넣는다. 시큼하다. 문득 고향집 우물 옆에서 섶(덩굴지거나 줄기가 약한 식물을 버티도록 꽂아 두는 꼬챙이)을 타고 오르던 포도넝쿨이 늙어버려 자르고 맺혀있던 덜 읽은 포도를 따서 입에 넣었을 때 느꼈던 신맛이 떠올랐다. 그때 기어오르던 포도넝쿨을 잃어버리고 홀로 서있던 섶은 무척 외롭게 보였다. 겨울날에는 무척 춥게도 보였다. 할머니도 지금 자기 몸을 기대고 지내시던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혼자 겨울을 보내시고 있다. 내가 만약 할머니가 마지막 부탁하신 말, 할머니가 아플 때 좀 도와주면, 그것은 춥고 외로운 할머니의 가슴이나 손을 따뜻하게 감싸는 외투나 장갑이 될까? 할머니가 기댈 수 있는 조그만 섶이라도 될까?

임만빈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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