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을사5적' 이완용이 참석했다.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성당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완용이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갈 때 가지고 있던 칼로 이완용의 복부와 어깨 등을 찌르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피습 후 출혈 과다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 퇴원, 총리대신으로 복귀하여 8월 한일병합조약 체결의 주역으로 국권 피탈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이재명은 이듬해 9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1890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이재명은 열다섯 살에 미국노동이민사의 하와이 이민 모집에 응모, 미국에 건너가 수년간 노동에 종사했다. 그러나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항일운동을 위해 귀국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평양 방문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하려고 평양역에 대기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단념했다. 이토가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되어 목표가 사라지자 이재명은 친일 매국노 이완용 암살로 목표를 바꿨다.
▶1882년 최초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전구 등장 ▶1992년 광케이블 국내 첫 개통
정보관리부 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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