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바다는 겨룰 상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눈치채고 바다를 경외하며 그 품에 안기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바다에 길을 내는 무모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대신 바다 언저리에 등대를 세워 길을 알려주고 있다.
등대는 육지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신호등이 되고,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순항을 기원하는 빛이 된다.
그러나 독도 등대는 사뭇 다르다. 밤에 독도를 목적지로 해 들고나는 배들은 없다. 독도 등대는 배들의 운항 안내보다 존재 그 자체에 무게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라는….
독도 등대에 근무하는 등대원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포항해양항만청 소속 독도 등대원 허원신(39·9급 기능직)씨는 주소를 독도로 이전한 독도 주민이다. 그는 지난 7월 일본의 역사교과서 해설서 왜곡에 분통이 터졌다. 독도 등대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항의의 표시로 주소를 독도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독도 근무 교대 때 울릉읍에 들러 "등대 근무자인데 독도로 주소지를 옮길 수 있느냐?"고 물은 후 이전 신고를 했다.
다음날 허씨는 주소 이전 사실을 잊은 채 날씨가 더워 접안장 근처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때 독도 주민이 한명 더 늘어난 사실이 알려지고 독도 등대로 전화가 빗발쳤다. 독도 근무자 5명 가운데 누구인지 몰라 허둥대던 차에 뒤늦게 허씨가 나타나 자기가 주소를 옮겼다고 했다. 언론은 그의 주소지 이전을 대서특필했고 인터뷰 요청이 잇따랐다. 그는 하루아침에 생각지도 않은 유명세를 탔다. 나중에는 언론 취재에 시달리다 못해 휴대전화를 꺼버렸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고향이 경주 양포인 허씨는 선장 일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배를 타는 일이 주어진 업(業)이라 생각하고 대학 전공도 수산어업과를 택했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미국 포틀랜드 부근에서 꽁치잡이 원양어선을 타고 실습에 나섰다. 2년여 배를 탔으나 원양어선 선원병역특례가 잘못되는 바람에 군에 입대하면서 진로가 바뀌었다. 제대 후에는 10여년간 포항의 한 철강회사에 근무했다. 공장생활 동안 그는 전기기사 등 각종 면허와 자격증을 취미 삼아 취득했다.
철강회사에서 노조 관련 일을 보던 그에게 다른 지역에 있는 자회사 이동 권고가 들어오면서 다시 삶의 방향을 틀게 됐다. 허씨는 그동안 딴 자격증을 밑천 삼아 해양항만청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고 늦깎이 등대요원이 돼 고향과도 같은 바다로 돌아오게 됐다.
사람 순한 허씨는 같은 조 근무자 신성철(32·8급 기능직)씨보다 나이가 많지만 언제나 "아이고, 우리 고참님"하면서 곧잘 너스레를 떤다. 등대 근무 2년 만에 스킨스쿠버, 기기 조작, 요리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인이 된 그는 요즘 독도경비대원의 도움을 받아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영어요? 그냥 심심하니까 하죠. 만일 외국인이 등대를 방문하더라도 등대를 그저 '라이트하우스'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등대 시설과 운용, 역사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어요."
그러나 허씨는 내년 1월 교대를 끝으로 순환 원칙에 따라 다른 등대로 가야 한다. 그는 이곳에 주소를 옮긴 만큼 얼마간이라도 더 근무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다른 직원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다.
독도 등대의 최선임자 신씨는 5세, 3세된 두 아들의 아빠이다. 말수가 적고 속으로 챙기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다. 그런 그도 한달 동안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아이들 재롱을 그리워하는 기색이다. 큰 돈을 들여 화상휴대전화를 구입한 그는 틈나는 대로 가족들과 통화한다.
독도 등대는 이렇듯 자신을 바다와 한몸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희생을 태워 밤바다를 밝히고 있다. '희생'을 태운 불빛은 여느 등대의 그것보다 날이 서고 강렬하다. 그 때문에 밤바다 저 멀리 웅크린 무엇이 이곳을 노리다가도 독도 등대의 그 푸른 서슬에 꼼짝없이 꼬리를 내리고 마는 것이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