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취재차 영국 런던에 갔을 때 한인들이 모여 사는 뉴몰든에서 민박을 했다. 일요일에 아침을 먹는데 한 조기유학생이 외박을 나왔다. 런던 근교의 사립 보딩스쿨(기숙형 학교)에 다니는 고2 학생인데 한 달에 한번 주말에 외출할 수 있어 나왔다고 했다. 아침을 먹으러 식탁에 앉아있는데 아주머니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남학생이 지난밤에 한 여학생(홍콩 유학생)을 데리고 와 동침을 한 것이었다. 민박집 주인은 한번 다녀간 그 학생이 예약을 할 때 친구를 한명 데리고 온다는 말을 했지만 여학생인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영국의 경우 미성년자가 호텔에서 異性(이성)과 숙박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래서 여학생과 함께 외박을 나온 그 학생은 민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10대들의 개방적인 섹스풍조로 미혼모 천국이다. 몇 년 전에는 미혼모가 된 10대 세 자매가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세 자매가 아기를 낳을 당시 나이는 각각 12세, 14세, 16세였다. 이들 어머니는 두 번 이혼했고 역시 10대때 아이를 낳았다.
한국도 영국처럼 10대들의 성개방은 새삼스런 현상이 아니다. 찬반논란을 떠나 이미 심각하다는 게 중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부모들이 "내 아이만은 착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요즘 10대들 사이에 '찐따'라는 말이 있다. 덜떨어진 사람을 가리키는 비속어다. 10대들 사이에서는 성경험을 하지 않으면 찐따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성경험을 하지 않는 게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심지어 수치로 여길 정도라는 것. 10대들 사이에 성경험을 뜻하는 은어인 '콩깐다'라는 표현은 아마도 부모세대들만 모르고 있을 것이다.
선정적인 스포츠신문에서는 한술 더 뜬다. 최근에 본 한 성칼럼에서는 100번 정도의 섹스는 성경험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허풍'을 떤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이런 이야기가 10대 여학생 사이에서도 '무용담'으로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과장된 섹스 무용담은 이른바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하이퍼리얼(hyper-real, 파생실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난무하다 보면 10대들 사이에 성문화에 대한 과잉 이미지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퍼리얼이란 실재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현실을 지배하는 것을 가리킨다. 미디어에 의해 하이퍼리얼이 확산되면서 이내 현실의 문화적 현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험을 하지 않은 10대들에게 성경험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찐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모델이 현실이 된다는 것은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과속스캔들'의 한 장면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흐흐 난 고1때……." 남현수(차태현)가 "중3때 질렀다(섹스)"고 말하자 황정남(박보영)이 한 말이다. 영화에서 남현수는 중3때 이웃집 연상의 누나와 첫 경험을 했다. 미혼모에서 태어난 황정남은 다시 고1때 섹스를 해 아들을 낳고 미혼모가 된다. "어렸을 땐 반항을 안했어~ 임신을 했지……."라는 황정남의 대사도 나온다.
이 영화는 조선시대의 조혼 문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려 '대박' 신화를 만들고 있다. 반면 이 영화는 10대들의 '조기 섹스'를 부추기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10대들의 개방적인 성문화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의 소재인 미혼모 문제에 대한 고민은 거의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영화의 실재하지 않는 현실(하이퍼리얼)이 진짜 현실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조기 섹스나 미혼모 문제를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면 제2, 제3의 남현수, 황정남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찾은 영화관에는 '조조'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10대들이 관객이었다. 보드리야르는 미디어가 욕망을 재현한다고 했는데, 10대들도 이 영화를 보고 행여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최근에는 소설을 영화화 한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영화도 인기몰이를 했다. '과속스캔들'과 함께 일탈적인 성문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두 영화 모두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실재하지 않는 현실인 '파생실재'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모델을 선행하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현실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미혼모의 이야기를 다룬 '별을 보내다'라는 책이 있다. 황정남과 같은 '어린 엄마'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담겨있다. 10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봐야 할 것은 이 책이 아닐는지.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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