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10월부터 스멀스멀 찬기운이 번지는 흐리고 무거운 공기가 거대한 바윗덩어리처럼 유럽대륙으로 굴러들어온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색깔의 코트깃을 세워 움츠리고 걷는다. 나 같은 여행자는 향수병에 걸리기에 딱 좋다. 낮에는 우울하고 찬 바깥바람에, 밤에는 수십 년 동안 그 방안에서 살아온 듯 고집스럽게 텃세를 부리는 방안의 냉기에 지쳐간다. 발이 꽁꽁 언 채 양말을 신고 침대에 눕는 일은 얼마나 피곤한지 모른다.
유럽에는 대게 집안에 온풍기가 있긴 하지만 전기세가 비싸기 때문에 한겨울이 아니고서야 틀지 않는데다, 온돌방에 익숙한 우리에게 온풍기 따위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종일 찬바람을 맞고 돌아다녀도 저녁이면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누울 수 있는 우리집이 몹시 그립다. 그래서 너무 추운 날엔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껴안고 자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럽의 겨울이 좋다. 크리스마스 때문이다. 상점마다 진열된 모양도 얼굴 표정도 다양한 산타클로스들의 컬렉션, 광장에 들어선 끝도 없는 노천시장의 행렬과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기념품들, 털모자를 쓰고 모여든 사람들…, 그 틈을 혼자 비집고 다녀도 괜히 마음이 설렌다.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때 기념품을 잘 사지 않는다. 배낭이 무거워지는 게 싫은 탓도 있고, 막상 집에 돌아와서 꺼내보면 그걸 살 당시의 몹시 갖고 싶었던 마음이 이미 다 없어져버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작은 물건들보다 그 물건들을 팔고 사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도저히 발길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기념품이 발견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나보나 광장에서였다. 그 곳에는 매년 12월 8일부터 1월 6일까지 야외 크리스마스 마켓이 축제처럼 열린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온갖 악세서리와 질좋은 수제품들과 먹거리가 많아서 축제기간엔 언제나 붐비는 곳이다. 내가 그 곳에서 발견한 건 못생긴 마녀 인형이었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휘번덕거리는 눈이 몹시 고집스러워보이는 마녀는 누더기 치마를 입고 빗자루를 타고 있었다. 살짝 잡아당겼더니 빨간불이 들어온 눈매가 장난스러워지면서 팔다리로 오두방정을 떨며 킬킬킬 웃는다. 나는 배낭을 메고 노점상 앞에 서서 혼자 한참을 웃었다. 그 상점에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또 모두 다른 얼굴의 마녀들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었다. 한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마녀들부터 천정에 매달린 커다란 마녀들까지 크기도 색깔도 모양도 어느 것 하나 똑같은 마녀는 없었다.
"핸드메이드! 핸드메이드!" 상점에서 나온 따뜻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서툰 영어로 말을 건다. 직접 다 자신이 만든 작품들이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나는 사지 않을 건데 싶은 마음에 퍼뜩 상점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옆집에도 그 옆집에도 마녀들만 주렁주렁 걸려있었고 나는 또 눈을 떼지못하고 마녀 구경에 나섰다.
왜 로마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설매 탄 산타클로스 대신 빗자루 탄 마녀들이 장악한 걸까. 마녀의 이름은 '베파나(Befana)'. 베파나는 매년 1월 6일 이탈리아의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는 마녀 할머니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신발을 현관 앞에 놓아두면 베파나는 착한 어린이에게는 선물을, 나쁜 어린이에게는 숯을 넣어주고 간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12월 25일 아기예수가 태어난 성탄절보다 1월 6일 아기예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공개된 '주의 공현 축일'을 더 성대하게 치른다. 이 날 아기예수를 처음 방문한 동방박사들이 선물들을 가지고 왔고 선물을 받은 예수가 다른 어린이들에게도 선물을 하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베파나도 동방박사들과 함께 아기예수를 방문해서 선물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게으름을 피우다 일행을 놓쳐 길을 잃고 혼자 남게 되었다. 아기예수가 누구인지도, 예수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마녀는 아무 어린이든 만나기만 하면 선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한 명은 아기예수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어리버리 서툴고 게으른 베파나 마녀의 이야기에 나는 홀딱 반해버렸다. 빨간옷을 잘 차려입고 루돌프가 끄는 멋진 썰매를 타고 오는 인자한 산타클로스 대신 누덕누덕 기운 옷에 낡은 빗자루를 타고 오는 심술궂은 베파나 할머니라니! 그런 멋진 전설을 가진 이탈리아 사람들이 사랑스럽다.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광장 분수대에 쪼그리고 앉아 못생길수록 더 매력적인 저 마녀인형을 살까말까 고민에 빠졌다. 나는 결국 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곧 끝날 것이고 나의 여행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므로. 베파나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가서 네 살배기 조카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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