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크리스마스 선물

한 해의 끝자락이 가져다주는 아쉬움과 서글픔은 크리스마스의 성대한 추억과 의도된 어수선함으로 인해 어느 정도 상쇄된다.

서구문화에서 넘어온 성탄절의 이미지는 다분히 이국적이고 환상적이며 화려하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찬이니 당연히 교회문화와 관련된 축제지만 어릴적 기억은 단조롭던 삶에 산타할아버지가 등장하는 특별한 이벤트의 날이었다.

아주 어릴적부터 무수히 들어와 진부하게 느껴지는 산타클로스는 기원전 4세기경 터키의 아나톨리스 지방에 살았던 성 니콜라스라는 분이 실존 모델이다. 어린이를 좋아했다는 그는 살면서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난한 세 자매 얘기가 산타 할아버지의 전형이 되었다고 한다. 세 자매들은 구혼자가 있었는데도 가난으로 인해 결혼을 못하자 성 니콜라스가 지붕에 올라가 금주머니를 떨어뜨렸고 그 주머니가 우연히 벽난로에 걸어 뒀던 양말에 들어갔다. 이 이야기가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할아버지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국민소득 1천불이 안 됐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가 다 살기 어려웠다. 누구나 예외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 기억은 다분히 시끄러웠던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밑층은 시장골목 상가였고, 윗층은 그래도 근방에서는 제법 잘 지은 다가구 상가2층 이었다. 그 2층에서 여섯 가구, 십여명이 가족처럼 다정히 지내던 기억이 흑백사진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다닥다닥 붙은 방들 사이로 스며나오는 온갖 생활 소리들이 요즈음엔 시빗거리지만 그 시절에는 다정함이요, 인간들의 삶 자체로 받아들여졌다. 그 소란함 가운데서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당연히 산타할아버지가 찾아올 것이란 기대감에 받고 싶은 선물을 일일이 손꼽으며 이브날을 맞이한다.

어린 시절 나는 꿈 많은 소녀였다. 읽은 책들과 들은 얘기, 본 영화들을 마구 섞어서 혼자 메리 크리스마스에 대한 놀라운 환상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 성탄절 전 날, 작은 소녀는 예기치 않은 선물에 대한 설레임과 소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때도 있었다. 간신히 눈을 감은 후 일어나보면 마음속 깊이 간직 했던 꿈이 풍성한 현실이 되어 있곤 했다.

열살 때의 크리스마스 전 날 어김없이 잠을 설쳤다. 그날 반짝이는 예쁜 포장지에 감춰진 선물 하나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활자를 좋아한 나머지 인쇄된 것은 잡식성으로 마구 읽어대던 내게 소란한(?) 나의 이웃이 '빨간 머리 앤'이란 예쁜 표지의 동화책을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빌려 내게 건네준 것이었다. 이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선물을 받은 그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신문이나 잡지, 심지어는 주간지까지 마구 읽어 대던 내게 접해보지 못한 아름다운 책에 대한 경이로움은 일생동안 책을 고르는 지침이 되었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혼란스러운 고비고비마다 '빨간머리 앤'의 씩씩함과 현명함이 나를 다시 세워주었다.

또 다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흐린 하늘 때문에 되돌아본 이린 시절의 기억들이 따스하고 아름답다. 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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