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왜 하필 '나'인가?

원치 않는 불행과 맞닥뜨릴 때/고통 딛고 일어서는 지혜 배워야

샌디에이고에 사는 재미동포 윤동윤 씨의 슬픔에 대처하는 자세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며 윤 씨의 집을 덮친 바람에 사랑하는 부인과 어린 두 딸, 장모 등 네 명의 가족을 일순간에 잃었던 그다. 끔찍한 참사다. 그런데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슬픔 속에서도 윤 씨가 보여준 의연한 모습이 우리를 울먹이게 한다. 하루아침에 자신이 가장 아끼던 사람들을 앗아간 사고기 조종사에 대해 그는 한마디의 저주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조종사도 사고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조종사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서른일곱밖에 안 된 사람이 어쩌면 저토록 웅숭깊은 속을 가졌을까.

더구나 각지에서 답지한 후원금 전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 후원금은 나를 위해 쓰라는 게 아닌 것 같다"며 생전에 아내가 즐겨 기부했던 복지재단 등에 보내겠다고 했다. 극한의 슬픔과 고통을 아름다운 인간애로 승화시킨 성숙한 모습이 존경스럽다.

누구라도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일과 맞닥뜨려지기도 한다. 더욱이 그것이 자신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비극이라면 그 앞에서 우린 갈팡질팡하게 되고 세상을 원망하며 바닥 모를 고통의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도 된다. 느닷없는 말기암 선고, 파산,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왜 하필 나지?'라며 억울해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수도 리치먼드에는 아서 애쉬(Arthur Ashe:1943~1993)라는 한 스포츠 스타의 동상이 서있다 한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버지니아에서 가난한 경비원의 아들로 태어난 애쉬는 흑인은 테니스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메이저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남성이었다. 두 번이나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그는 1979년 심장 질환으로 선수 생활에서 물러난 뒤 인권운동가'자선사업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1990년 뜻하지 않게 수혈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됐다. 하지만 애쉬는 절망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봉사활동을 펼쳤다. 1993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땐 여성 앵커가 방송 중에 우느라 제대로 방송을 못했을 만큼 미국민의 존경을 받는 영웅이었다. 생전의 그에게 한 팬이 편지에서 물었다. "왜 신은 당신에게 그토록 나쁜 병을 줘야만 했을까요." 그가 답했다. "나는 우승컵을 들었을 때 '왜 나지(Why me?)'라고 묻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오늘 고통을 당한다 해서 '왜 나지'라고 물어선 안 될 것이다. 고통에 대해 '왜 나지'라고 묻는다면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해서도 '왜 나지'라고 물어야 하지 않겠소." 절망에 굴하지 않는 애쉬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무자년이 저물어간다. 한 해의 끝머리에서는 언제나 '다사다난'을 떠올리게 되지만 올 일 년은 유난히도 이래저래 소요스러운 한 해였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촛불집회는 우리 국민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전 세계적 경제 침체로 내년 우리네 경제 전망도 온통 어두운 소식뿐이다.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에서 직장인들은 혹 목이 달아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마치 짙은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아득해 보이는 답답함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 이럴 때 南宋(남송)시대 陸游(육유)가 지은 '遊山西村(유산서촌)'이라는 시를 한 번 읊조려 봐도 좋을 것 같다. '산이 다하고 물길 끊어진 곳에 길이 없는가 했더니/ 버드나무 어두운 곳, 밝게 피어있는 꽃 너머로 또 하나의 마을이 있네(山窮水盡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암울한 현실로 인해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 때라도 정신을 차려 눈을 들어 보면 헤쳐 나갈 길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2천 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갈라지고 터진 우리의 가슴을 사랑으로 싸매고 영원한 평화를 주기 위해서였다. 미움과 증오일랑 이젠 떠나보내자. '왜 하필 나지?'라며 원망과 절망 속에 빠지기보다 윤동윤 씨처럼, 애쉬처럼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성숙한 사랑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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