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말연시 나들이, 놓치면 후회할 경북 명소] ④끝·남부권

▲ 은해사에 들렀다면 반드시 중암암(돌구멍절)을 찾기를 권한다. 앙증맞게 작은 암자이지만 조망이 좋은 것은 물론 전설들이 수두룩하다.
▲ 은해사에 들렀다면 반드시 중암암(돌구멍절)을 찾기를 권한다. 앙증맞게 작은 암자이지만 조망이 좋은 것은 물론 전설들이 수두룩하다.
▲ 은해사에는 사랑나무가 있다. 100여년생인 참나무와 느티나무로 이뤄진 이 연리지(連理枝)는 임신부들에게 인기다. 연리지를 왼편으로 돌면 아들을 낳고, 오른쪽으로 돌면 딸을 낳는다는 신통한 나무이기 때문.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손을 잡고 돌면 사랑의 묘약이 된다는 전설도 있다.
▲ 은해사에는 사랑나무가 있다. 100여년생인 참나무와 느티나무로 이뤄진 이 연리지(連理枝)는 임신부들에게 인기다. 연리지를 왼편으로 돌면 아들을 낳고, 오른쪽으로 돌면 딸을 낳는다는 신통한 나무이기 때문.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손을 잡고 돌면 사랑의 묘약이 된다는 전설도 있다.
▲ 중암암 해우소는 절벽 위에 지어져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기막힌 화장실이다.
▲ 중암암 해우소는 절벽 위에 지어져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기막힌 화장실이다.

1년에 365번 뜨는 해지만 1월 1일의 태양만큼은 의미 있는 장소에서 만나고 싶다. 그곳이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영험'한 곳이라면 더욱 좋다. 누구나 새해 첫날을 밝히는 해를 보며 가족의 건강이나 복을 빌고 싶게 마련이기 때문.

그러나 동해로 떠나 일출을 보려니 교통체증이 걱정이다. 명산에 올라 해돋이를 고즈넉이 보고 싶으나 캄캄한 밤, 험한 산을 오르기가 부담스럽다. 번거로운 수고는 들이지 않되, 의미 있는 장소에서 새해를 맞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명소가 있다. 대구 지척에 자리한 은해사의 암자 중 하나인 중암암. 그곳이라면 올해 마지막날과 새해 첫날 가족나들이 코스로는 제격이다.

◆숨은 비경, 돌구멍절

은해사의 장점은 가깝다는 것과 조용하다는 점이다. 팔공산 뒤편이라 대구서 30여분만 달리면 된다. 입장료도 2천원으로 저렴하다. 하지만 은해사의 가치는 숨어있는 비경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은해사만 잠시 들렀다 발길을 돌리는데 은해사의 참맛을 알려면 두 시간 정도는 더 투자해야 한다. 은해사를 지나쳐 빼어난 극락전과 아름다운 불단을 품은 백흥암을 제쳐놓고 중암암(中巖庵·돌구멍절)으로 향하는 등산길로 접어들면 비로소 비밀의 문이 열린다. 은해사가 거느린 8개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중암암까지는 산길로 1.4㎞. 쉬엄쉬엄 걸으면 40~50분가량 걸린다.

중암암으로 오르는 한적한 길은 기암괴석들과 아름드리 나무들에 눈이 매혹당해 땀 흘릴 겨를조차 없다. 중암암에 다다를수록 길이 험해지고 가파르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낼 수 있어 비밀스런 곳임을 더한다. 등산을 좋아한다면 은해사 뒤편 태실봉을 출발해 중암암으로 가는 등산로도 추천할 만하다. 태실봉은 조선 12대 인종대왕의 태실이 있는 곳.

자녀를 동반한 나들이객이라면 자동차를 이용하자. 은해사에서 중암암까지 포장도로가 잘 닦여있다. 은해사 입구에서 '중암암 간다'는 말을 하고 입구를 통과하면 된다. 눈이 오면 자동차 이용은 불가능하지만 은해사에 눈이 오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여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암암은 모든 것이 돌로 시작한다. 대웅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돌구멍을 지나야 한다. 어둡고 캄캄한 석굴이 아니라 맑은 햇살이 들어오는 대문 같은 돌구멍이다. 돌구멍으로 들어서면 감추었다 내놓은 듯 작은 암자가 벼랑에 서 있다.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중암암을 '돌구멍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중암암의 진면목은 역시 돌구멍이다. 암자 대문만 돌구멍이 아니라 곳곳에 돌구멍이 산재한다. 이곳은 무엇 하나 그냥 보여주는 것이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돌구멍을 지나고 돌 틈을 지나야 한다.

그 가운데 암자 위로 난 돌계단을 올라보면 극락굴이라는 돌구멍이 반긴다. 굴이라기보다는 돌 틈이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돌 틈이 사각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데 좁고 어두워서 마음에 욕심이 많거나 허영심으로 몸집을 키운 사람은 두려워서 첫발을 선뜻 들여놓기가 무서울 게다. 하지만 굴을 빠져나오며 느끼는 쾌감은 말로 할 수 없다. 극락굴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어 자칫 지나칠 수 있지만 꼭 극락굴을 지나갈 것을 추천한다.

쉽게 떠날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암자 마루에 앉아 구름을 내려다보고 산을 마주본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가끔 울리는 풍경소리, 산새소리뿐. 돌구멍절을 떠나며 마음속 욕심은 버려놓고 간다.

◆돌구멍절에 얽힌 재미난 사연

돌구멍절에는 기막힌 해우소가 있다. 돌구멍절 자체가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인 듯 모든 것이 자그마하고 돌구멍 속에 있는데 해우소 역시 그렇다. 머리를 숙여 겨우 지나가야 하는 바위 밑 벼랑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해우소는 공인받지는 않았지만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진기록을 갖고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는 것.

이 기록에 관한 재미난 얘기도 전해져 온다. 예전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멍절에서 수행하는 세 명의 도반 스님이 만나 각자의 절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통도사 스님은 "우리 절은 법당문이 얼마나 큰지 한번 열고 닫으면 그 문고리에서 쇳가루가 한말 석되는 떨어진다"며 자랑했다. 이에 해인사 스님은 "우리 절은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 쑬 때는 배를 띄워야만 닿을 수 있다"고 말을 받았다.

두 스님의 얘기를 듣고 있던 돌구멍절 스님은 절 규모로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자 꾀를 냈다.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스님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서 절을 찾아 조그마한 카메라를 화장실에 넣고 그 깊이를 측정하려고 했지만 깊이를 가늠하는 데 실패하기도 했다.

돌구멍절에 왔다면 반드시 극락굴(화엄굴)을 찾아보자. 암자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 뒤에 큼지막한 바위가 있는데 그 속에 사각 모양의 좁은 돌구멍이 있다. 굴이라기보다는 두 개의 바위가 맞닿은 조그마한 틈이라는 표현이 맞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이 돌 틈은 좁고 어두워서 마음속에 욕심이 많거나 허영심으로 몸집을 키운 사람은 통과하기가 힘이 든다.

예전 김유신 장군이 수도하면서 비책과 신검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 극락굴을 통과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이 굴을 빠져나오면서 극락을 다녀온 것 같은 쾌감을 얻었다. 비좁은 공간에서의 해방감, 그리고 두려움을 벗어났다는 기분은 상쾌함을 더한다.

돌구멍절에서 산 위로 10분가량 걸어가면 '산꼭대기에 웬 평지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꽤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아늑한 이 공간 뒤쪽에는 기암괴석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위에는 영천군수 조재득(1759년 8월 부임, 1762년 7월 이임)과 그의 동생들인 원주판관과 고성현감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그래서 인(印), 즉 관인을 가진 세 사람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해서 이곳을 삼인암(三印岩)이라고 불린다. 이런 사연 덕에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자녀가 모두 고시에 합격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때만 되면 고시생 부모들의 합숙소가 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돌구멍절에는 사연이 깃든 곳이 많다. 김유신 장군이 화랑 시절인 17세 때 이곳에서 심신단련을 하면서 즐겨 마셨다는 약수터인 '장군수'(將軍水)와 옛날 한 승려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집채만한 바위가 암자로 굴러 떨어지려고 해 급히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자 바위가 떠올라 훨씬 뒤의 안전한 자리로 옮겨앉았다는 얘기를 담은 건들바위도 있다.

또 돌구멍절에서 서쪽으로 200m쯤 가면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인 만년송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자리가 팔공산에서 기(氣)가 가장 강하게 흐른다고 해서 많은 참선인들의 명당으로 통한다.

◆모든 딸들의 애환이 서린 유등지 반보기

청도 화양읍 유등리에 있는 유등지(柳湖蓮池·유호연지)는 연 재배지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지만 모르면 평범해보일 이 연꽃 호수에는 시집간 딸의 애환이 서려 있다.

딸이 시집가면 친정나들이는 꿈도 못 꾸던 조선 중종 시절 이곳 유등지에 군자정이라는 정자가 생기면서 '유호연지 반보기'라는 세시풍속이 전래됐다. 한가위 전후로 하루 말미를 내 이곳에서 친정엄마를 상봉할 수 있는 '중로상봉'(中路相逢) 즉, '반보기'가 허용된 것.

딸은 친정엄마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루고 친정엄마도 꿈에도 그리던 딸에게 줄 음식을 장만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고 한다. 이런 모녀의 애틋한 정은 유등지 물결 따라 퍼져나갔다고 한다.

'반보기'라는 명칭은 친정길을 반만 간다고 해서, 다른 가족들을 모두 볼 수 없다고 해서, 그리고 눈물이 앞을 가려 친정엄마의 얼굴이 반만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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