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그 자리에 있지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은 인간이다. 도심 가까이에 있는 산은 친밀감을 더해 주지만 멀리 있는 산은 그저 등산하기에 좋을 뿐이다. 비슬산(琵瑟山)이 그러했다. 달성군이 대구의 발전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비슬산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비슬산은 이제 저 멀리에 있는 명산(名山)이 아니라 시민과 호흡하는, 친밀한 산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투-타-타-타." 칼바람이 부는 겨울날 헬기에 올랐다. 달성군 논공읍 달성공단 인근 착륙장을 떠난 헬기는 곧장 비슬산을 향했다. 눈 덮인 크고 작은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태백산맥의 지맥인 대견봉(大見峰·1,083.6m)을 정점으로 최정산(915m), 청룡산(793m) 앞산(659m) 병풍산(568m) 대덕산(602m) 등등… 그 이름만으로도 정겹다.
◆헬기에서 내려다보니…
헬기가 고도 1천500m 상공에 이르자 와우산성이 맨 먼저 눈에 띈다.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저 멀리 낙동·금호강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있고, 이웃한 팔공산도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성주 쪽에는 가야산, 구미 쪽은 금오산이 희뿌연 구름 위에서 그 자태를 뽐내는 듯했다.
기수를 돌려 정상으로 향하자 대견봉이 손에 잡힐 듯 나타났다. 대견봉을 떠받치고 있는 병풍바위와 신라고찰 유가사의 모습도 장관이다. 향토사학자 강광수씨는 "이곳은 비슬산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선인들의 칭송을 받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때 헬기를 조정하던 오항기 기장은 "사방으로 곧게 뻗어내린 비슬산의 아름다움은 전국 어느 산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거들면서 "대부분 산 정상은 뾰족한 모양인데 이곳은 능선으로 길게 퍼져있어 색다르다"고 했다.
비슬산의 3봉(峰)으로 불리는 대견봉과 조화봉(照華峰·1,058m), 관기봉(觀機峰·990m)은 저마다의 전설을 갖고 있다. 대견봉은 신라 때 중국 당나라 황제가 어느 날 세수를 하려는데 대야 물속에서 험한 지형에 웅장한 절(寺刹)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본 데서 유래됐다. 당나라 황제가 중국 곳곳을 뒤졌으나 찾지 못하자 이웃인 신라에 사람을 보내 찾은 것이 바로 비슬산 대견사지였다. 황제가 신라에 돈을 보내 절을 짓게 하고 중국에서 보았던 절이라고 해 대견사라고 명명했고 제일 높은 봉우리를 대견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대견봉 남쪽의 조화봉은 대야 물속에 대견사와 함께 중화(中華)까지 비췄다는 뜻으로 조화봉(照華峰)으로 불린다. 전설에 사대주의적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 씁쓸함이 있지만 이제 와서 조상들이 붙인 이름을 어쩔 것인가. 당시 중국 황제의 대야에 비친 풍경이 헬기를 타고 내려다본 지금의 모습이 아닐까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그러나 이들 봉우리 중간에 얼마 전에 세워진 콘크리트 건축물(홍수 통제소)이 이방인처럼 낯설다. 팔공산 방송중계탑처럼 자연 질서와 경관을 해치는 존재가 된 듯해 안타깝다.
◆다시 떠오르는 명산
기수를 동쪽으로 돌리자 청도 쪽 긴 능선을 따라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까지 눈에 들어온다. 능선이 끝없이 이어져 장관을 더해준다. 저 멀리 가창에는 최정산이 보이고 그 뒤쪽에는 대구의 빌딩숲이 달린다. 청도 쪽으로 늘어선 봉우리·계곡이 제 나름의 몸짓을 자랑하고 있다. 비슬산의 동쪽 꼭짓점은 경북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이며, 서쪽은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남쪽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 북쪽 달서구 용산동이다. 네 꼭짓점을 이은 면적은 608.1㎢나 되며 달성군이 전체의 58% 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청도군과 대구 달서·남·수성구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왜 이곳에 비슬산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비슬산 정상의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 '비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비슬산이 포산(苞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비슬이란 말은 범어(梵語·예전 인도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채수목 전 달성문화원장은 "신라 때 인도의 스님이 비파 모양이라는 의미로 비슬산이라고 했고 조선 때는 비슬산의 한자가 '포(苞)'를 의미하기 때문에 '포산'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현풍(玄風)은 예전 포산으로 불렸다"고 했다.
비슬산은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온통 물바다가 됐는데 비슬산만 높아서 남은 곳이 있었는데 그때 남은 바위에 배를 매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바위의 형상이 비들기처럼 생겨 '비들산'으로 불리다가 '비슬산으로 불리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비슬산은 다양한 전설을 갖고 있는 만큼 그 역사와 신비함을 아직도 간직한 곳이다. 우리 조상들은 비슬산을 신령스런 곳으로 여기며 숭앙했다. 예전 비슬산이 호랑이·곰 ·나무 ·돌 등을 믿는 토템신앙의 근원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대구시민의 여가·휴식의 공간으로, 친근한 웰빙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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