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시간 후 식곤증에 시달릴 무렵 간호사들이 깔깔거리며 한권의 책을 내민다. 병원에서 정기 구독하는 여성지의 부록으로 나오는 단행본이다. '신년 특대호'란 풍성한 이름으로 단장된 그 책에는 가계부, 밑반찬 조리법, 아랫배 감추는 의상코디법 등 갖가지 신기한 내용들로 가득했는데 그 중 신년 토정비결 부분을 빨간 포스트잇으로 강조, 내게 내미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원초적인 갈망이 있다. 후천적인 노력이나 상황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미 예정된 자신 만의 운명이 있다고 믿는 까닭에 그렇게도 많은 예언가를 찾고 점성술을 믿지 않는가?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 책을 보는 순간 졸던 눈동자가 커지고 맥박이 빨라진다. 음력 생년월일을 기초한 상'중'하궤를 친절한 가이드북이 시키는 대로 조립, 내년 운세를 읽어보았다. 서술된 나의 내년은 흐뭇하게도 제법 그럴 듯하다. 탄력을 받은 김에 간호사들의 내년 운세까지 예언해주며 짐짓 용한 철학가 흉내를 내며 단조로운 일상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었다.
지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현학적 치기가 넘쳤던 시절, 무모하게 세계명작 100선을 독파하기로 맘먹고 100권 리스트를 작성, 책상 앞에 붙인 것은 여고 1학년 겨울 방학 시작 무렵이다. 결심을 실행하려고 한 날부터 나는 고행의 연속이였다. 리스트에 들어있는 파우스트의 완독은 인내의 결정판이었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로 이어지는 러시아 명작들은 주인공 이름과 가계도를 파악하고 나면 그 긴 장편이 끝날 정도로 등장인물과 구성이 방대했다. 하기야 톨스토이조차도 풀네임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라는 긴 철자임을 알고 아연실색 했다. 이러는 동안 나름대로 '명작을 독파함'이란 지루함과 오랜 참음으로 성취의 희열을 맛보는 고독한 수행이란 기상천외한 정의를 부여하였다. 이런 고행속에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단편집을 발견하고 내용의 간결함과 단아함 때문에 오아시스를 만난 듯 청량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토정비결을 보면서 간호사들과 깔깔거리던 동안 문득 톨스토이가 생각났다.
신에게 버림받은 천사 미하일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깨닫고 오라고 인간 세상에 보내진다. 구두장이 셰몬과 마트료나 가정에서 몇 년간 보내면서 그 천사는 세 가지를 다 알아낸다. 사람 안에는 사랑이 있었고, 사람은 절대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을 가질 수 없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모두가 힘을 합쳐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세 가지 진리였다. 신이 자신의 앞날에 대한 예측의 능력을 안주셔서 사람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 없는 것이고 그러하여 사랑이 필요하며, 사람 안에 있는 사랑 때문에 앞날을 알 필요가 없도록 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앞날을 예측하고 일희일비하는 것은 부질없지 않을까?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이벤트로 토정비결보고 행운이 넘치면 넉넉해하고 다소 모자라는 내용이면 박장대소하며 넘겨버리자.
053)253-0707,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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