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설대목을 앞둔 대구 중구 태평로 번개시장은 옆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가야 할 정도로 북새통이었다. 북적이는 시장통을 헤집고 찾아간 시장 안 생닭 판매점. 생닭을 잡아 손님들에게 파는 지향단(48·여)씨는 매우 분주했다. 악수를 건네자 지씨는 취재진의 손을 꽉 쥐지 못했다. 인대가 늘어나 오른손 검지가 구부러지지 않는 탓이었다. 지씨가 이곳에서 일한 지는 벌써 2년이 됐다. 하지만 시장 안 누구도 지씨의 본명을 모른다.
"다들 '김은아'로 알고 있어요. 한국사람 중에 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돕니다."
지씨는 재중동포였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전 한국에 왔다고 어렴풋이 기억하고있다.
그녀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한 곳은 서울 미아리 한 섬유공장이었다. 월 20만원을 받고 3년을 일한 지씨는 사장이 고의부도를 내고 잠적하는 바람에 3년치 임금 700여만원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그 와중에 만난 사람이 전 동거인인 김모(44)씨. 그러나 아이를 낳고 8년간 같이 살며 김씨가 지씨에게 남긴 것은 손바닥의 굳은살과 닳아버린 연골뿐이었다.
"제가 벌어온 돈만 쓰면 그래도 나았지요. 아픈 아이를 핑계로 여기저기 돈을 빌렸어요. 그 돈을 갖고 집 밖으로만 돌고…." 결국 아들이 초교 1학년 때 지씨는 김씨와 헤어졌다.
"그 아들이 지금 열다섯살입니다. 열다섯살이지만 휴학을 몇번 해서 올해에야 중학교로 진학해요."
이날 오후 들른 서구 비산동 지씨의 집에서 취재진을 맞은 것은 아들 민영(15)이와 방안을 감도는 '냉기'였다. 보증금 300만원에 사글세 240만원짜리 집. 집안 곳곳에 스며든 냉기 때문에 집 안과 밖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민영이와 지씨의 어머니(68)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달랑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 엉치뼈에 무혈성괴사증이 생겨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는 10년 전 딸에게 의지하려 한국에 왔지만 수술비가 없어 아직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도 민영이는 잘 자라줬다. 172㎝, 80㎏의 덩치는 또래에 비해 월등했다. 덩치가 좋아 2007년에는 대구시교육감기 씨름왕에도 올랐다. 때문에 씨름부가 있는 다른 초교 감독들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민영이의 양쪽 귀는 얼핏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특히 오른쪽 귀는 아예 막혀 있다. '소이증'이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조금 뚫려있는 귀. 이것도 지난해 9월 민영이가 다니던 비산초교에서 민영이의 사정을 안 학생과 교사들이 모은 성금 200여만원으로 수술을 받은 덕분이었다. 민영이가 지금까지 받은 수술은 모두 네번. 앞선 세번은 초교 1, 2학년 때 받은 것으로 이 당시에도 수술비는 지씨가 다니던 공장 사장이 대출을 받아 마련해줬다.
"공장에서 오른손 검지 인대를 다쳤어요. 또 사장님 덕분에 민영이 귀수술도 했는데 제 손가락 부상까지 떠넘기긴 미안했어요."
중학교에 가서도 씨름을 하고 싶어하는 아들. 하지만 엄마는 영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운동을 시키면 돈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일한 한국 국적자인 민영이는 늦었지만 2007년 5월부터 소년가장으로 기초생활수급자에 선정돼 매달 23만원의 정부 지원을 받고 있다. 지씨도 하루 12시간 일해 월 80만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 세 식구가 먹고 살기엔 부족하지 않을 수도 있는 돈. 하지만 의료보험 혜택이 전혀 안 되는 지씨와 지씨 어머니가 병원에 가면 기본 40만원의 의료비가 청구돼 이것도 빠듯하다.
때문에 국적취득을 위해 백방으로 뛴 지씨. 하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 등 관련 기관에서는 "남편을 데려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이런 사정으로 비산초교 교사들이 지난해 탄원서를 제출하기까지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국적의 벽이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라며 막무가내로 떠난 사람과 어찌 다시 살라는 말입니까." 고단한 세상살이에 지씨의 입에서는 한숨만 계속 터져나왔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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