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인민을 향한 국가테러가 절정을 목전에 두고 있던 1932년 스탈린은 독일의 한 전기작가와의 면담에서 독재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비밀을 제시했다. 그는 독재가 유지되는 것은 소련 인민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니냐는 그 전기작가의 말을 부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진정 우리가 테러와 위협만으로(1917년 혁명 이후) 14년간 권력을 유지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현대 독재체제의 작동과 유지의 원리는 두 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지도자와 체제의 우수성에 대한 선전, '내부의 적들'에 대한 감시와 처벌이 그것이다. 이는 독재국가가 비밀경찰과 억압받는 다수의 희생자로 양분되어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도록 유혹한다.
이 같은 설명이 타당성을 얻으려면 국가테러의 정점에 있는 독재자가 죽었을 때 인민들이 마음 깊이 감춰두었던 敵意(적의)와 환희를 여과 없이 분출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스탈린과 히틀러가 죽었을 때 인민들이 보인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수많은 애도 인파가 방부처리된 시신이 전시된 모스크바 노동조합회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시신을 보려고 서로 밀치면서 수백명이 질식사했고 다수의 경찰기마가 밟혀 죽었다.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의 태도도 같았다. 2차 대전 후 영국 검열관들은 독일인들의 편지에서 히틀러가 아직 살아있기를 바라는 필사적인 열망을 자주 확인할 수 있었으며, 1967년까지도 서독인의 3분의 1이 "전쟁만 아니었다면 히틀러가 독일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꼽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현상'은 많은 정치학자들을 당혹하게 한다. 그러나 리처드 오버리 같은 역사학자는 충분히 설명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독재는 독재자와 주민의 共謀(공모)위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은 권력기반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과 히틀러 치하에서 정치적 반대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일치와 정치적 화합이라는 대중 사이의 약속에 도전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또 유태인, 반혁명분자 등 제거 대상 집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민은 1939년 처형된 소련 소설가 이사크 바벨의 말처럼 "침대에서 담요를 뒤집어 써야만" 가능했지만 어쨌든 사적 생활이 보장됐다. 정치적 순응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지불한 대가였다. "반대와 저항은 예외적이었으며… 순응은 같은 편을 뜻했고 불복종은 배제를 뜻했다. 그렇게 엄한 윤리적 선택을, 그것도 가장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맞이했을 때, 대다수는 적이 아니라 동지가 되는 편에 섰다."('독재자들' 교양인)
이 같은 주장은 북한 독재체제의 유지 비결을 설명하는데도 유용해 보인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 인민이 보여준 집단 히스테리성 애도의 물결은 스탈린 사망 당시의 소련 인민의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에서 수백만명이 굶어 죽었으면서도 북한 인민의 저항은 없었다. 그때의 위기는 다소 해소되긴 했지만 굶주림과 무저항의 결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를 두고 국내의 한 학자는 '체질화된 피동성'이라고 설명했다. 오버리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작년 8월 중순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진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면담하는 등 '재기'를 과시했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김 위원장이 여전히 북한을 통치하고 있음을 확인해 준 것"이라고 평했다.
김정일의 건재는 우리가 북한을 바라보는 틀(frame)의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 '호의호식하는 권력자와 굶주리는 인민'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북한 체제 역시 인민의 협조와 공모 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항 없이 60년 이상 유지되고 있는 세습독재와 집단아사라는 慘劇(참극)에도 꿈틀대지조차 않는 인민들의 태도는 이 같은 추론을 낳게 할 만하다. 이제 통일의 방법과 전략에도 새로운 접근이 요구되고 있는 것 같다.
정경훈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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