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매일 아침 신문에서 공포에 질린 이슬람 아이들의 눈동자를 본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군홧발소리와 총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잊고 살아간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소식은 나에게는 조용한 일상을 조금 술렁이게 하는 지구 저편의 소식일 뿐이지만, 그곳의 아이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내던져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이자 삶이며 현재이고 역사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면서 생전 처음으로 전쟁의 흔적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나는 여태껏 '총'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커다란 장총을 멘 남자들이 건물 앞에 보초를 서고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에서 서성이는 풍경은 내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겨우 소매치기를 하다가 걸린 소년에게도, 관광객에게 구걸을 하며 몰려다니는 헐벗은 꼬마들에게도 쉽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그런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마치 그 총부리가 나에게 들이대어진 듯 공포에 질렸다.
'총'이란 것을 쉽게 볼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처음으로 감사했다. 물론 우리에게도 불과 20세기 후반까지 잔인한 학살과 폭력의 역사가 있었으며, 지금도 우리는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 총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였다. 다마스커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당시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나라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한창일 때였지만 다마스커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했다. 나는 막 시원하고 달콤한 열대과일주스 한 잔을 사서 거리로 나왔다. 아직까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들 중 하나로 꼽히는 시리아에는 맥도널드 같은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은 없지만 그 대신 신선한 열대과일을 즉석에서 바로 갈아 만들어주는 과일주스전문점이 어디에나 있다.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푸짐해서 샌드위치와 함께 먹으면 거뜬히 한끼 식사가 된다.
낡씨가 맑은 기분 좋은 오후였다. 무더위에 아랑곳 없이 시커멓고 긴 차도르(무슬림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스카프)로 온몸을 휘감은 여자들이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나를 흘낏거리며 지나간다. 시리아 여인들의 검은 옷과 검은 차도르 때문에 거리는 온통 검정색 일색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차도르가 나부낄 때마다 화려한 색깔의 바짓단이 얼핏 보인다. 아주 가끔 파란색 보라색 차도르를 쓰고 패션감각을 뽐내는 여자들도 눈에 띈다. 나는 손에 들고있는 열대과일주스의 강렬한 무지개빛을 들여다보았다. 다마스커스의 중심가는 '컬러'에 대한 여인들의 숨은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 듯 했다.
다마스커스에서 가장 큰 바자르(이슬람 나라들의 시장)의 차도르가게에 가면 거리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화려한 색의 차도르들이 쇼윈도우와 가게안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가게 안의 고급 차도르들 대부분은 중국산, 그리고 가장 비싼 것은 한국산이다. 생각해보면 '차도르'의 생긴 모양이 한국으로 치면 옛날 할머니들이 봇짐을 싸는 보자기랑 비슷하지 않은가. 한국의 보자기 만드는 공장에서 지구 저편 중동국가의 차도르를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코믹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 다마스커스의 택시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수입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유명한 소형자동차들이 한국과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나라, 시리아의 주요 도로를 가득 메우며 택시로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나는 시리아와 수도 다마스커스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과 친하다고 하는 유럽과 일본보다도 더 '메이드 인 코리아'를 사랑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 때였다. 나는 열대과일주스를 들고 다마스커스 시내 중심의 우마야드모스크 앞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휴일 오후라 광장은 평소보다 더 붐볐다. 정말 순식간이에 "탕! 탕! 탕!"하고 들려온 그 소리는 분명히 총성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뻣뻣해져 온몸이 마비된 듯 멈춰섰다. 광장의 소란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치 비디오 플레이어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내 앞의 모든 풍경이 정지했다.
그리고 잠시 후 풍경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나 혼자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광장 속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내가 처음 가본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는 그런 도시였다. 대낮에 거리 한 복판에서 총성이 울려도 몇 초 후면 별일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일상이 흘러가는 곳. 대낮의 몇 발의 총성 따위 흘려들을 수 있을 만큼 전쟁과 폭력 가까이 살아가는 곳. 나는 새삼 이웃나라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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