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안동 땅의 청량산을 뒤로하고 한달음으로 영주 소백산을 올랐다. 작지만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험난한 청량산을 보았기에 청량보다 '큰 형님'인 소백산은 일행에게 초입부터 겁을 줬다.
소백산은 대단했다. 태백준령의 끝인 선달산을 경계로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 등 백릿길(40km)을 넘어 내달리는 소백준령은 태백준령 못지않게 웅대했다.
소백은 태백과는 분명 다른 얼굴이다. 태백은 험준한 고산준령의 기세를 가졌지만 소백은 기품있는 선비의 풍모처럼 단아했고, 유순하면서도 장중하고 기운차게 내달리는 형국을 하고 있었다.
일행이 찾은 겨울의 소백은 순백의 고요한 설국(雪國)이고, 어머니의 품속처럼 안온해 보였다. 영주 사람들은 소백을 일컬어 "붉은 기운이 감도는 봄과 푸르디푸른 여름 계곡의 정취를 넘어 가을 단풍과 겨울 설국의 풍광을 가진 보물"이라고 했다.
소백이 왜 편안할까? 소백의 봉우리들을 찾으면 그 궁금증이 단박에 풀린다. 소백의 주봉은 비로봉이다. 정상과 부근 능선이 융단을 깔아놓은 듯 민숭하다. 광활한 마루라고나 할까? 그래서 온화롭고 너그러운 모습인 것이다.
비로봉은 봄을 시작으로 여름과 가을을 거치면서 '꽃잔치'라는 선물도 세인들에게 주고 있다. 비로봉에서 태백준령 쪽 10리(4km) 거리에 소백의 제2봉인 국망봉(서울이 바라보인다고 해서 유래)이 있다. 역시 평탄하다. 모름지기 국망봉 '철쭉바다'를 보고 나서야 소백산 철쭉을 말해야 할 만큼 소백산 철쭉의 왕도(王都)다.
소백의 셋째인 연화봉은 비로봉에서 서남쪽 10리 거리에 있다. 큰 형님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 국망봉이 '우백호'라면 연화봉은 '좌청룡'인 것이다. 연화봉 역시 정상이 평탄해 비로봉과 국망봉에 걸쳐 소백의 초원 대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소백산도 그저 안온하지만은 않다. 소백의 큰 줄기에서 다소 떨어진 곳(비로봉의 동남쪽)에 위치한 도솔봉은 소백에서 유일하게 '날카롭다'. 정상에는 바위가 솟아있고, 동편 비탈은 층층의 절벽이다. 장중하면서도 기운차게 달려온 소백의 위용을 한눈에 바라보도록 도솔봉이라는 또 다른 선물을 소백에 안긴 건 아닐까?
영주 사람들은 소백을 '영남의 진산(鎭山·도읍지나 고을을 보호하고 제사를 지내는 주산)'이라고 부른다.
금창헌 영주 소수박물관장의 설명은 이렇다. 영남지방의 큰 병풍은 소백과 태백준령으로 나뉜다. 태백은 강원도 땅인 태백산에서 뻗어나온 반면 소백은 경상도 땅에서 우뚝 솟아 저 멀리 영남지방에 수많은 산줄기를 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주·영풍 향토지에는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 등 영남지방의 명산들이 모두 도솔봉을 거쳐나간 줄기에서 솟아 있으니 도솔봉은 많은 명산들을 아우로 거느리고 있는 셈"이라고 적고 있다.
소백을 말할 때 옛 길을 빼놓을 순 없다. 옛길의 대명사로 문경의 조령(새재)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일반인들에겐 덜 알려졌지만 연화봉과 도솔봉 사이에 위치한 죽령은 영남의 3대 관문(문경새재, 추풍령) 중 맏형 격이다.
눈 덮인 소백산 정상에서 내리치는 소위 '풍기바람'을 안고 죽령의 정상인 영주시 풍기읍과 단양군 대강면 경계에 올랐다. '오르막길 30리, 내리막길 30리에 아흔아홉구비'라는 죽령은 침을 쉼없이 삼켜야 할 만큼 길고 가팔랐다. 고개 정상에서 풍기 쪽 옛길을 내려다보니 바로 급경사였고, 눈까지 내려 '네발(?)'을 동원해야 고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박석홍 영주시 학예연구원은 "죽령고개는 예부터 한 국가나 한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중요한 장소이며 역사와 문화권을 다르게 발전시켜온 분기점이다. 또 사람이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정을 나누었던 장소요, 오고 가는 길손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땀을 씻고 쉬어가던 휴식공간"이라고 말했다.
고개 정상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그 옛날을 더듬었다. 죽령 굽이굽이마다 남긴 길손들의 한숨과 웃음을 어찌 짐작할 수 있으랴. 영남의 수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때로는 과거에 낙방해 쓰라린 가슴을 안고 다시 고개를 넘는 선비들의 모습이 선했다. 문서를 한아름 안은 고을 관원, 어깨가 부서질 만큼 짐을 진 봇짐장수의 땀도 고개에 묻어 있었다.
그러면 죽령고개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길손들이 오갔을까? 고개 정상에서 26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 박양순(52)씨는 "고속도로가 나기 전까지는 서울가는 길이 여기밖에 없어 한마디로 하루종일 길손들로 붐볐죠. 쉴 시간이 없어 오죽했으면 아기를 가게 기둥에 매놓고 장사를 했겠어요? 길손 덕에 애들 교육하고 결혼도 시켰죠"라고 했다.
죽령 정상에는 지금도 '죽령주막'이라는 초가 두 채가 길손들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으로 몸을 녹여주고, 막걸리 한 사발로 피로를 풀어주고 있었다.
박석홍 학예연구원은 "죽령은 고개 마루를 분수령으로 해 동남으로는 1천300리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열고, 경상도 특유의 유불문화와 충절의 역사를 이룬 것은 물론 서북으로는 남한강을 열어 한강문화를 꽃피웠다"고 설명하고 있다.
죽령은 역사도 품고 있다. 죽령은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격전지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 때 죽령은 고구려의 국경선이었다. 이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해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죽령 이북(지금의 충북)의 10여 고을을 빼앗았고, 삼국통일 직전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며 장군인 바보 온달이 아내 평강공주와 왕에게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다짐하고 출전해 전사한 장소가 바로 죽령이었다. 반대로 죽령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신라의 김유신은 중원 땅(충주지방)에 삼국통일 기념탑을 세웠다고 한다.
금창헌 소수박물관장은 "죽령은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인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신재 주세붕 등과 얽힌 옛 이야기도 많다"며 "소백산과 죽령을 영주를 대표하는 역사문화 자산으로 보존·활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종규 기자 영주·마경대 기자 사진 정재호 기자
자문단 금창헌 영주 소수박물관장 김준년 전 영주 선비촌장 박석홍 영주시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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