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산 비슬산] ⑤불교와의 각별한 인연

"千人이 득도할 자리…" 산세 빼어난 곳마다 산사·암자

▲ 안양루에서 바라본 용연사 풍경.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 고즈넉한 산사에 운치를 더하고 있다. 비슬산은 수려한 산세만큼 천인(千人)이 득도할 자리로 알려져 곳곳에 들어선 사찰과 암자가 찾는 이들의 번뇌를 달래주고 있다.
▲ 안양루에서 바라본 용연사 풍경.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 고즈넉한 산사에 운치를 더하고 있다. 비슬산은 수려한 산세만큼 천인(千人)이 득도할 자리로 알려져 곳곳에 들어선 사찰과 암자가 찾는 이들의 번뇌를 달래주고 있다.
▲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바위틈에서 물이 용솟음치는 용천사.
▲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바위틈에서 물이 용솟음치는 용천사.
▲ 용연사 악양루에서 상원 주지스님이 법고를 치고 있다.
▲ 용연사 악양루에서 상원 주지스님이 법고를 치고 있다.

동장군의 맹위도 입춘이 다가오자 한결 누그러졌다. 오랜만에 비슬산에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예년보다 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산과 들엔 그야말로 단비다.

명산고찰(名山古刹). 이름난 산에는 대부분 오래된 산사(山寺)들이 자리한다. 산세가 아름다운 곳에는 사찰·암자가 주인이다. 비슬산은 불교와의 인연이 각별하다. 비슬산은 가섭(迦葉)부처님의 터로 산신인 정성천왕(靜聖天王)의 도움으로 천인(千人)이 득도할 자리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100여 암자가 있었다고 전하며 용연사, 유가사,용천사, 남지장사 등 이름난 절이 많다.

◆호국의 성지 용연사=현풍방면으로 5번 국도를 가다 간경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수백년 된 아름드리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단비를 맞은 나무에 한결 생기가 돈다. 벚나무 가로수 길이 1㎞ 남짓 될까. 밤 벚꽃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어서 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곳을 지나면 옥연지가 나오고 3㎞ 정도 오르면 용연사가 있다. 용연사에는 중장비 소음이 요란하다. 이곳 절 앞에 연못(龍淵)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용연사는 못에 용이 살았다는 곳에서 유래됐다. 용연지를 지나면 일주문이 나온다. '비슬산용연사자운문(琵瑟山龍淵寺紫雲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모습이 멋지다. 퇴색된 단청에서 옛 용연사의 번성을 보는 듯하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적멸보궁(寂滅寶宮) 가는 길이 나온다. 적멸보궁은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위쪽 금강계단(金剛戒壇·보물 제539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달리 불상을 모실 필요가 없다.

용연사에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것은 스님들의 호국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곳에 봉안된 사리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와 통도사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통도사에 봉안해 놓은 진신사리가 위험해지자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모셔 가던 중 일과를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 비슬산은 최대 승병 훈련장으로 쓰였으며 사명대사가 이곳에 기거했다. 상원 주지스님은 "절의 지세를 보면 좌청룡이 수려한 곳이라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키면서 이를 보고 통도사 진신사리를 분가해 모시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상원 스님은 "최근 법당에 있는 관세음보살을 개수하다 발견된 복장유물에서 '건륭 27년(1764년)인 영조 때도 246명의 승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라며 용연사가 호국불교의 산실이었음을 강조했다.

이곳에는 문화재 자료 제28호인 삼층석탑과 지방 유형문화재 41호인 극락전 및 사명대사를 모신 사명당과 명부전 등이 있다. 적멸보궁 입구 왼쪽에는 화강석으로 된 7기의 부도탑이 용연사의 역사를 무언으로 말해준다.

◆유가종의 유가사=비슬산 유가사에 가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최근에 조성된 절 입구에 만들어진 시비와 돌탑이다. 시비에는 '비슬산 가는길'과 '찬 포산이성 관기도성'이 음각돼 있다. 돌탑을 지나면 천왕문 전각이 있는데 안이 텅비어 있다. 원래 사천왕의 탱화가 모셔져 있었으나 절도범이 훔쳐간 것을 되찾아 대웅전 안에 모셔 놓았기 때문이다.

최근 절을 다시 고친 흔적이 곳곳에 있다. 원당암에서 옮겨온 3층석탑은 새로 짝을 맞췄고 취적루를 고친 시방루 지붕에 누른색을 띤 기와를 놓았는데 주변 환경과 가람이 일치하지 않아 눈에 좀 거슬린다. 유가사는 신라 유가종의 본산으로 알려져 있다. 유가(瑜伽)는 범어(梵語:yoga)의 음역으로 '상응(相應)'으로 의역된다. 주관과 객관이 일체의 사물과 상응·융합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비슬산의 암석이 아름다운 구슬(瑜)과 같아 부처님이 형상(伽)을 닮았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곳에는 나한전·산신전 등 전각이 있고 가뭄이나 질병, 환란 등 어려움이 당했을때 주민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탱화 괘불(掛佛)이 유명하다. 특히 최근 일연시비 건립에 이어 인근에 테크노폴리스 조성 등과 맞춰 사찰에서 '시가 있는 등산로'를 추진하고 있다. "비슬산의 지천에 있는 돌에다 '님의 침묵' 같은 친숙한 시를 새겨 시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게 곽종열 유가사 신도회장의 설명이다.

◆용천사와 남지장사=비슬산 남쪽 기슭 청도 각북에 용천사가 있다.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법사가 창건, 옥천사라 했는데 당시 해동화엄전교 10대 사찰로 꼽혔다. 옥천사는 고려 때 일연이 중창하고 보조국사 지눌을 기려 불일사(佛日寺)라고 했는데 왕(원종)이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친다고 해 친히 용천사(湧泉寺)라 부르도록 했다. 당시 용천사에는 백련암 등 47개 암자가 속해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대웅전이 임란 이전의 건축기법을 계승하고 내부는 화려해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나 보물 지정을 신청했으나 보수 등을 이유로 지정받지 못하고 있다. 용천사는 물이 샘솟는 우물(湧泉)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부도 6기가 있는데 규모면에서 여타 사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웅대하고 장엄하다.

남지장사는 비슬산에서 약간 비켜난 최정산에 있다. 신라 신문왕 4년(684년)에 양개조사가 왕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때로 오랜 전란으로 많은 군인과 백성이 죽어 이들의 원혼을 달래려고 왕실에서 곳곳에 지장사를 세웠다. 이때 대구 인근 5곳에 지장사가 세워졌는데 후세에 대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위치에 따라 이름을 붙었는데 지금은 북지장사(팔공산)와 남지장사만 남았다고 한다. 이곳 남지장사도 승병들이 양성한 곳으로 이름났으며 번창기에는 8개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청련암과 백련암만 있다. 남지장사에는 지금 한창 불사가 이뤄지고 있어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