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는 남의 글 읽는 것에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는 종합선물세트의 뚜껑을 여는 것 같은 기쁨을 준다.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이것저것 골라보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열하일기'에는 '호질'이나 '허생전' 같은 재미있는 단편소설을 비롯하여, 압록강을 건너 심양, 산해관,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 청조 중국의 문화를 생생하게 보고 기록한 민족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기문이담, 연암 선생 스스로의 일상이나 신변잡기를 기록한 에세이나 수필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르의 글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한편으로는 학자 혹은 작가로서의 박지원과 그의 사상, 그의 양식을 감상하는 기쁨이 있다. 유학에 한 발을 담갔으되, 또 한 발을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에 내뻗었던 박지원은 이 '열하일기'에서도 그러한 그의 성향을 곳곳에서 솔직하게 드러낸다. 결국 이런 진보적 사고와 분방한 작풍이 필화를 일으켜 이 책은 금지도서의 굴레를 쓰게 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고루한 유학자의 책보다는 훨씬 화통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청나라 세상이 된 지 겨우 4대에 불과하지만 문화와 무력을 오래 부지해 왔고, 백년 동안을 태평세월로 국내, 국외가 잠잠하니 이런 세월은 한나라, 당나라 시절에도 없었다. 이런 성과는 범연한 일이 아니라 오늘의 천자도 역시 하늘이 마련한 우두머리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리상호 옮김/보리/전 3권/2만5천원.
'열하일기'가 커다란 사상에서부터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까지를 1인칭의 시점으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다면,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최초의 국비유학으로 선진국들을 둘러본 작가가 자신이 얻은 서구에 관한 지식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내놓은 '서양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유길준이 당대의 외국 저서를 많은 부분 참고, 원용했음을 고려하더라도, '서유견문'이 보여주고 있는 세계인식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새로운 세계'를 일주하면서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을 하나라도 더 조국에 소개하려 힘썼던 선생의 애간장이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열하일기'는 18세기 말에 한문으로, '서유견문'은 19세기 말에 국한문혼용체로 쓰여졌다. 사상은 진보적이었으되 그 형식은 여전히 일반 백성들에게는 소원한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두 책이 멋진 우리말로 번역된 오늘날, 유길준 선생의 서문은 더더욱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나라의 글자는 우리 선왕께서 창조하신 글자요, 한자는 중국과 함께 쓰는 글자이니, 나는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온 나라 사람들-상하, 귀천, 부인, 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저들(서구 열강)의 형편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유견문』 유길준 지음/허경진 옮김/서해문집/609쪽/1만6천700원.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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