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자랑스러운 한국, 좁은 땅이지만 그동안 알뜰히 가꾸고 피땀 흘린 결과로 이제는 제법 떵떵거리며 살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픈 기억 속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우리 혈족들입니다. 어렵고 배고픈 시절에는 연명에 급급해서 다른 식구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습니다만 이제 우리도 그들을 챙길 만큼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채문 교수의 『동토(凍土)의 디아스포라』(이채문 지음, 경북대 출판부, 2008)는 바로 이들 잊어버린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조선후기부터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이주했던 한인, 즉 고려인들의 삶과 한을 세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내용 가운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슬픈 이야기 한토막입니다.
'연나라 사람 형가(荊軻)는 역수(易水)를 건너다가 노래를 지어 불렀거늘 한국 사람인 나는 두만강을 건너다가 눈물을 흘려 강물에 뿌리니 이것이 무슨 일이뇨. 오늘날 이 눈물은 나 한 사람만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나보다 먼저 간 몇 만 명의 조선 사람이 흘린 눈물이며 나보다 후에 오는 한국 사람들도 다 흘릴 눈물이라. 오호라 두만강 건너편은 산천인물이 생소하고 언어풍속이 다른 곳이라. 사천년 조상의 유업이며 억 만세 자손의 산업을 다 버리고 외국에 나가는 내가 이 강에 와서 어찌 서러운 눈물이 없으며, 이 천만 동포와 삼천리강산에 금조각 같고 비단결 같은 조국을 이별하고 시베리아 빈 들판을 밟고 정처 없이 흘러가는 자가 이 강에 와서 어찌 서러운 눈물이 없으랴.'
사연은 이렇습니다. 1860년대 조선북부지역에 대흉작이 나타났습니다.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지만 조선정부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화전민이 되거나 유민이 되어 떠돌 수밖에 없는 상황, 설상가상으로 가뭄과 흉년이 지속되고 세도정치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목숨연명을 위해 탈출하기 시작합니다. 1869년 6천500여명의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했습니다. 조선정부는 이주금지령을 내리고 초병까지 배치하면서 막았지만 그들은 필사적으로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러시아 국경 근처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허무하게 버려진 수천 구의 시체가 두만강의 조선강변에 어지럽게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분포된 600만 해외동포, 우리 스스로 대한민국의 잠재력이라고 자부하는 해외교민들의 이주역사입니다. 그러나 14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우리의 뇌리에서 이들에 대한 기억들이 전무한 듯합니다. 솔직히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채문 교수는 바로 이 안타까움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저서는 알찬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제정 러시아가 극동아시아로 진출한 배경을 시작으로 한인의 러시아 극동지역 이주와 생활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시기 극동지역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게 된 이야기와,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다시 러시아의 극동지역으로 재이주당하는 지금의 현실까지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최근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인들이 많아졌으며, 그들이 어려운 생활을 꾸려야만 하는가. 극동 러시아를 떠도는 현대판 한인 디아스포라가 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의 실태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채문 교수의 『동토의 디아스포라』는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겨울과 궁합이 맞는 책입니다. 방대한 러시아어 자료를 활용했고, 신고전경제학적 이주이론으로 설명을 하고 있어서 전문성과 대중성을 골고루 갖추었습니다. 학문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무한한 지식과 정보, 그리고 재밋거리를 선사할 것입니다.
노동일(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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