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 이야기](6)민족시인 이상화(상)

시인 그 이상…식민시대의 등불로

대구를 상징할 만한 사람 중 이상화(李相和)를 빼놓을 수는 없을 성싶다. 다들 이상화를 시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하게 시인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옳지 않다. 비록 마흔둘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강한 민족의식으로 고뇌와 비분과 저항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조국의 말과 글로써 식민지시대를 밝힌 지조 있는 민족시인으로 기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대구는 이상화의 고향이다. 그는 1901년 4월 5일 서문로에서 부친 이시우(李時雨)와 모친 김신자(金愼子) 사이의 네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 아래로 사회학자이자 우리나라 초대 IOC위원을 지낸 체육인 이상백(李相佰), 수렵가 이상오(李相旿)가 있다. 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큰아버지인 이일우(李一雨)가 세운 학숙인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한문교육을 받았다. 이때의 체험이 훗날 인격 형성에 크게 도움됐다. 그와 함께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혼자 있을 때에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성실성은 모친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경성중앙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갔다. 그의 나이 열다섯살 때의 일이다. 그러나 학업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친구인 백기만의 증언이다. 그리하여 3년을 수료하자 곧장 대구로 돌아오고 말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상화는 대구에 있었다. 종교계와 백기만 허범 하윤실 등 대구고보 학생들이 주동이 돼 거사 모의를 하던 중 시위 전날 홍주일을 비롯한 주요 인물의 예비 검속으로 차질을 빚게 됐다. 그는 서울에 있던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 화를 모면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3월 8일 강행됐고 많은 인원이 검거 투옥됐다.

그는 프랑스 유학이 평소의 꿈이었다. 준비 단계로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외국어 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프랑스 유학의 꿈을 접고 서둘러 귀국하고 말았다. 관동대지진은 우리네 한국인들에게는 엄청난 참변이었다. '조선인들이 습격해 온다''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등 갖은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이 거리에 있던 한국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그 같은 참상을 지켜보면서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조국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단념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그는 잠시 대구에 머물다가 서울로 올라가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1926년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함으로써 일약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갈등과 좌절에 빠져 지냈다. 그 시대 대다수 문학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조선병'을 앓고 있었다. 술이나 종교, 그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병, 허무의 깊은 골짜기로 도망하고 싶어도 조국의 모습이 안타까워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불치의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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