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게

"한 시간이나 기다렸단 말이예요!" 진료실에 뛰쳐 들어오며 아주머니 한 분이 상기된 표정으로 내뱉은 첫마디다. "미안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난감해하며 위로해보지만 그다지 누그려 들지 않고 이제는 접수하는 직원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잠시만 기다리면 된다면서 한 시간이 잠시인가? 목소리도 퉁명스럽고…, 저번에 처방한 약은 듣지도 않고…." 기다리면서 난 짜증이 여러 각도로 분출되는 듯 했다.

사실 내가 그리 미안해 할일도 하지 않았고, 원무 직원의 목소리가 그리 퉁명하지도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그 아주머니가 진료 받으러 오셨을 때 다른 환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그 분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나 또한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식으로든지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빨리빨리'라는 고질병이 있다. 나 역시 이 병에 시달리고 있는 중증 환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식당에 가면 "제일 빨리 나오는 음식이 뭐예요?" 미장원에 가면 "얼마나 기다려야 되나요?" 택시를 타면 "얼마나 가야 하나요?"라고 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운전할 때 신호 대기 중 신호가 바뀌어도 앞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김없이 독촉 경적을 보낸다. 반가운 것은 이런 중증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무척 많고 심지어는 나보다 더 빨리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꽤 있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혈관 깊숙이 '빨리빨리'증후군을 가진 단군후예 배달민족의 동질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우리 민족의 나쁜 성격이라고만은 보지 않았다. 우리 민족을 이만큼이라도 이끌어 온 강한 추진력이라고 생각하면서 합리화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교정이 필요하다. 한강 다리가 끊어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가스가 폭발하는 사회적 병리 현상들이 '빨리빨리' 서두르다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천천히 살고 싶다. 우연히 들었던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제1악장이 요즈음 내 삶의 화두가 되고 있다. '느리게,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말이다. 삶 자체를 여유롭게 천천히 변화있게 만들고 싶다. 왕후처럼 우아하게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연인과 드라이브하듯 부드럽게 천천히 운전을 하고, 유명가수의 디너쇼를 감상하듯 천천히 식사를 하고 싶다. 의학적으로도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뇌혈관계 질환 유병률이 높다.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 지배도 더 많이 받는다. 빨리 서두르는 것은 수명을 재촉하는 일이다.

급하게 서두를 때마다 떠오르는 불가의 설화가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 도를 이룰 수 있는 기간을 물었다. "삼년쯤"이라는 대답에 제자가 길다고 불평하자 "삼십년"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어리둥절하여 다시 재촉하자 이제는 스승이 "삼백년"이라는 대답과 함께 '월급월만(越急越慢)'이란 금언을 남겼다. 급하면 급할수록 천천히 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속담처럼 말이다.

새해에는 지나치지 않게 천천히 살고 싶다.

고운미피부과의원 원장(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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