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당신 '털 속치마'

호당 수억원 호가 박수근 화백, 정작 당대엔 가족들 끼니걱정

요즘 문화계의 압도적인 화제 가운데 하나는 호당 수억 원에 이르기도 하는 박수근의 그림 값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박수근의 그림 값이 원래부터 그렇게 비쌌던 것은 결코 아니다. 살아계실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별세한 지 5년 후인 1970년에 개최되었던 유작전에서도 스케치는 작품당 3천 원에서 1만5천 원, 유화는 1호당 1만5천 원에서 2만 원 사이에 거래되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부터 박수근의 그림 값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5년 현대화랑에서 열렸던 그의 20주기 회고전에서는 호당 1천만 원을 호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박수근의 그림 값은 폭등의 서막에 불과하였다. 새천년을 고비로 하여 그의 그림 값은 호당 1억 원을 훌쩍 넘어버렸고, 이제 와서는 자갈밭에 떨어지는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1965년 5월 6일, 박수근이 저승으로 주소를 옮기면서 이승에다 남기고 간 마지막 유언 가운데 하나다. 다 알다시피 그는 착하고 정직한 분이었으며, 따라서 유언과는 달리 아마도 틀림없이 천당마을로 이사를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소처럼 선량하고 순박했던 그도 도둑질을 한 적이 단 한 번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일제 강점기. 아이를 업고 뜨거운 햇볕 속을 양산도 없이 나다니는 아내를 차마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어느 날 문득 가게에서 양산 하나를 훔쳐왔던 것이다.

'이토록 마음이 약하신 분이 나를 위해서는 도둑질마저도 할 용기가 있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의 뜨거운 사랑에 짜장 가슴이 벅차도록 감동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지은 죄를 매섭게 질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더니 글쎄, 그의 대꾸가 이런 것이었다.

"이 양산은 일본사람의 가게에서 훔친 것이오. 우리나라를 통째로 훔친 일본 사람의 양산 하나를 훔쳤을 뿐인데, 그까짓 것쯤이야 무슨 죄가 되겠소."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라는 거룩한 이름 아래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을 해봐도 자신의 말이 옹색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 다음날 양산을 반환하였다.

착하고, 정직하고, 마음마저 약했던 박수근이 왜 남의 물건을 훔쳤을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바로 그의 일생을 집요하게 따라다닌 뼈저린 가난 때문이었다. 이 점은 그가 남긴 다른 하나의 유언 속에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당신 털 속치마."

겨울도 아니고 봄날도 환한 봄날 이승을 떠나면서 그는 이와 같이 뜬금없는 유언을 남겼다. '광주리 장사하는 아주머니들도 모두 다 털로 만든 속치마를 입었던데 당신만 못 입었어'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털 속치마 타령을 늘어놓던 그가 끝내 아내에게 그 털 속치마를 사주지 못한 것이 그 무슨 통한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그 자신도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릴 호당 수억 원의 그림 값조차도 먼 훗날 그림 속의 곶감 박힌 떡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수근의 예술은 가난을 담보로 하고서야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가난의 아들과 딸들이었다. 가난하지 않았다면 일생 동안 가난한 사람만을 그려왔던 그의 그림은 애시당초 성립의 터전 그 자체를 잃고 말았을 터. 어디 그뿐이랴. 박수근의 그림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오돌토돌한 화강암 질감을 창출해내었던 위대한 어머니도 바로 다름 아닌 그의 뼈저린 가난이었다.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서 같은 캔버스에 몇 번씩이나 그리고 긁어내고 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독특한 박수근 표 질감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으니, 아아, 예술가의 숙명적이고도 이율배반적인 가난이여, 아아!

이종문(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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